올해 3·1절은 102주년을 맞는다. 3·1절은 대한민국의 국경일 중 하나로, 1919년 3월 1일 독립을 선언하고 대대적으로 만세시위를 펼친 역사를 기리고 대한민국 헌법정신인 '3·1 운동 정신' 탄생을 경축하는 날이다. 

1910년대, 흩어져 있었던 독립운동단체가 3·1 운동으로 독립운동의 구심이 될 수 있는 민주주의 근간 임시정부 수립 운동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즉, 3·1 운동은 현재 대한민국 헌법상에서도 명시돼있는 임시정부 수립에 결정적인 계기를 부여했다. 

▲ (사진: 지금교육서울)

3월은 3·1절이 있어서, 8월은 광복절이 있어서 3월과 8월이 우리나라 독립운동에 대해서 흥미를 갖고 다시 알아보기 좋은 시기다. 이 시기를 맞춰 우리나라 근현대사를 소재로 한 영화들은 마케팅의 일환으로라도 3월과 8월에 맞춰 개봉하려 애쓴다.

우리는 문화를 소비하는 대중이다. 제작자의 입장이 아니기에 시기에 맞춰 문화를 즐기는 것은 그저 그 문화를 접하면 된다. 한국영화계는 그동안 독립운동가를 적절히 연출해 대중들 눈 앞에 여럿 소환시켰다. 이제는 교과서로만 과거 독립운동가들의 피와 땀을 느껴보는 시기는 지났다. 역사서나 교과서 등의 책 보다 더 생동감 있는 영화로 독립운동가들의 행적을 간접적으로나마 따라가 볼 수 있다. 과연 그동안 한국영화들은 어떤 독립운동가들을 어떻게 그렸을까? 3·1절에 영화로 만나볼 수 있는 독립운동가는 누가 있을까?

 

 

김구

정말 쉽게 생각해서, 가장 유명하고 우리나라 국민들이 가장 많이 알고 있는 독립운동가는 누굴까? 동그란 안경을 쓰고 두루마기를 입고서 항상 뒷짐을 지고 큰 덩치를 자랑하던 인물, 김구다. 

김구의 일생을 돌이켜보면 다양한 분야에서 독립운동 능력을 발휘했음을 알 수 있다. 먼저 동학농민운동에 참여하며 독립운동에 이르기까지 무장투쟁에 대한 중요성을 내내 강조하며 여러 의사들의 의거 활동을 뒤에서 지원했다. 1940년부터 7년 동안 임시정부 주석의 자리에서 국공합장 민족 단일 자주독립을 정치적으로 이끌기도 했다. '백범일지'를 통해서 문학적으로도 독립운동정신을 전파했다. 이렇듯 김구라는 인물을 왜 우리나라 국민들이 제일 잘 알고 있는지 이유를 알아보는 건 그리 어렵지 않다.

▲ (사진: 가운데-네이버 영화·비에이엔터테인먼트·무비스퀘어·씨네그루키다리이엔티, 오른쪽-네이버 영화·케이퍼 필름·쇼박스) 

한국영화계에선 대표적으로 두 작품이 김구를 표현했다. 먼저 김구가 김구 되기 전, 김구는 본명이 김창암, 김창수로 불렸다. 동학에 입교하면서 주로 김창수로 불렸다. 이 시기의 모습을 영화 '대장 김창수'가 그렸다. 김창수를 연기한 배우는 조진웅이었다. 그야말로 '스크린을 찢고 나온' 느낌이었다. 실제로 김구의 키는 180cm 넘는 당시 평균 이상 가는 신장이었다고 한다. 조진웅 배우가 보여주는 거구의 풍채와 강직한 인상은 김창수를 연기하기에 정확했다. 그리고 대중 대부분은 김구의 일생 중 독립운동에 본격적으로 몸 담은 후를 알고 있다. 대중들이 생소해하는 김구의 김창수 시절 모습을 주로 '대장 김창수'는 그렸기 때문에 볼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다.

다음으로 김구를 그린 영화는 '암살'이다. '암살'에서는 김홍파가 김구를 연기했다. '암살'에서는 김구가 주연은 아니다. 가공·창작된 독립운동가들이 주인공이다. 하지만 김구의 역할이 무의미하게 소비된 것은 아니다. 계속해서 독립운동가들이 의거 활동, 무장투쟁을 이어갈 수 있게 뒤에서 도와주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김구의 모습을 '암살'에서 그렸다. 김홍파 역시 조진웅만큼이나 김구를 외적으로 아주 흡사하게 그렸다. 앞서 말한 김구의 일반적인 인상, 동그란 안경을 쓰고 두루마기를 입고서 항상 뒷짐을 진 모습을 김홍파는 사실적으로 연기했다. 그리고 밀정이었던 염석진을 떠보는 장면은 영화적으로 봐도 긴장감이 넘치는 '암살'의 대표적인 서스펜스 장면이었다. 

김구 일생에 있어 전반기를 그린 '대장 김창수', 후반기의 모습을 담은 '암살' 이 두 영화를 본다면 좀 더 우리는 김구라는 인물을 다양한 감각으로 알아가는 데 성공할 것이다.

 

김원봉

냉전의 시기도 지났다. 공산주의는 절대 악, 자본주의는 절대선으로 나누는 구시대적 이분법적 사고는 상당히 낡았다. 이제는 공과 과를 구분하여 역사와 인물을 바라볼 줄 알아야 한다. 이 전제를 받아들이는 데 성공했다면 가장 먼저 주목해볼 법한 인물이 김원봉이다. 

물론 김원봉이 무장투쟁 독립운동을 이어오다가 광복 후 월북하여 북한 정권 수립에 공헌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이 사실이 김원봉에 대한 평가에 부정적으로 영향 끼친다면 어쩔 수 없다. 하지만 분명 무장투쟁 독립운동으로 일본으로부터 독립을 우리 힘으로 얻어내야 한다는 정신을 계속해서 전파했다. 그리고 여러 무장투쟁 의거 작전으로 당시 일본 조선총독부 조선 수탈에 있어 장애를 입었다. 이 활동에 최근 본격적으로 한국 상업영화계가 매력을 느껴 김원봉을 직접 혹은 김원봉을 모티브로 한 인물을 영화에 담기 시작했다.

▲ (사진: 가운데-네이버 영화·케이퍼필름·쇼박스, 오른쪽-네이버 영화, 워너브라더스코리아, 영화사 그림)
▲ (사진: 가운데-네이버 영화·케이퍼필름·쇼박스, 오른쪽-네이버 영화, 워너브라더스코리아, 영화사 그림)

먼저 김원봉을 다룬 작품들은 많았다. 하지만 상업의 목적을 가진 영화가 직접적으로 김원봉을 다룬 영화는 '암살'이 처음이라 봐도 무방하다. 직접 김원봉이란 이름으로 조승우가 연기했다. 김원봉이 극을 이끄는 주연은 아니었지만 나름 중요한 역할이었다. 극 중 독립운동가 안옥윤, 속사포, 황덕삼이 의거를 이행할 수 있게 규합하고 그들의 희생을 직접 위로한다. 김원봉의 삶을 고스란히 담은 것은 아니지만 상업영화에서 김원봉을 직접 언급하고 비중 있게 다루었다는 것, 그 존재감이 조승우라는 좋은 배우의 얼굴로 피어났다는 것으로 충분히 의미 있는 일이다.

'암살'의 직접적 표현에 힘 입어 '밀정' 역시 보다 자신감 있게 김원봉을 모티브로 삼은 인물을 담았다. 극 중 의열단장 장채산은 김원봉을 모티브로 했다고 알려졌다. 장채산은 '밀정'의 극을 단체로 이끄는 의열단이 본격적으로 의거 활동을 이행할 수 있게 뒤에서 전략적으로 지시한다. 그리고 조선총독부 경무국 경부 이정출을 이중밀정으로 삼자는 대담한 계획까지 구상한다. 이 모든 과정은 영화 '밀정'에 중요한 전개로 위치했으며 장채산은 이병헌의 얼굴로 그려졌다. '밀정'에서 나타나는 장채산의 행동, '밀정'에서 열연한 이병헌의 연기 등만 봐도 논란을 떠나 김원봉이란 인물이 어떤 인물인지 개괄적으로 짐작은 가능할 듯하다.

논란을 알고 싶거든 대상이 어떤지, 인물이 어떠한 인물인지 먼저 아는 것이 순서다. 글로만 책에서만 김원봉이란 인물을 만나보기 지루하지 않은가. 조승우와 이병헌이란 좋은 배우의 얼굴로 그려진 김원봉을 영화로 먼저 알아보는 건 어떨까. 

 

남자현

이번엔 영화로 관심을 시작해보자. 독립운동을 소재로 해 가장 많은 관객 수를 기록한 영화 '암살'의 주인공은 전지현이 연기한 안옥윤이다. 물론 극 중 안옥윤의 쌍둥이 자매 미츠코도 전지현이 연기했지만. 여하튼 '암살'은 여성 무장투쟁 독립운동가 안옥윤이 처음에서 끝까지 직접 극을 이끄는 영화다.

그렇다면 안옥윤은 완전 창작된 가상의 인물일까? 아니면 여러 인물들을 조합하여 탄생한 인물일까? 아니면 특정 독립운동가 1인을 모티브로 삼아 만들어졌을까? 안옥윤은 실제 여성 독립운동가 남자현을 모티브로 하여 창작됐다고 알려졌다.

남자현은 여러 종류의 독립운동을 이행했다. 3·1 운동 이후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가담해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 세력을 지원하는 업무를 맡았다. 이후 사이토 마코토 총독, 무토 노부요시 주만주 일본 대사 암살에 참여했다. 하지만 발각돼 1933년 8월 22일 옥중 사망했다.

▲ (사진: 왼쪽-네이버 영화·케이퍼 필름·쇼박스)
▲ (사진: 오른쪽-네이버 영화·케이퍼 필름·쇼박스)

솔직해져 본다면, 여성 독립운동가라고 하면 우리는 유관순 열사 이외에는 잘 모른다. 그래서 '암살'이란 영화에 추가적인 의의가 붙는 것이다. 단순히 여성이 극을 이끈다고 해서 '여성 영화'로 분류되는 것뿐만이 아닌, 안옥윤이란 가상 독립운동가로 실제 여성 독립운동가 남자현을 재조명시켜 분명히 독립운동은 남성만이 참여했던 것이 아닌 이름 모를 여성운동가들이 많이 참여해 진행될 수 있었다는 것을 영화 '암살'은 전지현의 얼굴을 빌려 전달했다. 

부디 대중들이 이번 3·1절에 잠깐의 시간을 내어 영화 '암살'을 본 후 여성 독립운동가에 대한 관심이 더 높아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박열과 카네코 후미코

아마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역사학계 안에서도 독립운동사를 전공하지 않는 이상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의 존재를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이렇게 인지도가 전혀 없는 인물을 흥행감독 이준익은 주목했고 영화 '박열'로 세상에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를 소개했다.

독립운동에는 반드시 무장투쟁운동이나 계몽운동으로만 분류되지 않는다. 이외의 분류에 해당하는 독립운동도 있다. 아마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가 그 분류에 해당되지 않을까 싶다.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는 일본에서 만났다. 둘이 연을 이어가는 사이 일본 정부의 재일 조선인들에 대한 무자비한 탄압과 학살은 이어졌다. 이에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는 '흑로회', '불령사' 등을 조직해 반일운동을 시작했고, 박열의 폭탄 구매 계획을 일본 경찰이 알아내 천황 암살로 날조하여 재판까지 끌고 갔다. 

▲ (사진: 왼쪽-동아일보 1927년 1월 21일 기사, 오른쪽-네이버 영화·박열문화산업전문유한회사·플러스엠)
▲ (사진: 왼쪽-동아일보 1927년 1월 21일 기사, 오른쪽-네이버 영화·박열문화산업전문유한회사·플러스엠)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는 실제로 조선인으로써의 정체성을 살려 일본 재판장에서 박열은 조선 관복, 가네코는 치마저고리를 입었다. 이에 더해 조선말로 발언할 테니 통역 붙여달라는 요구를 박열은 당당하게 했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의 행동을 당시 재판 판사 다테마스 가이세이는 그들을 사진으로 남겼고, 그 사진은 일본 전역으로 퍼져 1927년 일본 내각 총 사퇴되는 큰 파장을 일으켰다. 

위 과정을 영화 '박열'에서 모두 확인할 수 있다. 이준익 감독은 자신감 있게 밝혔다. 일부 영화적 상상이 필요한 장면 제외하고는 영화 95% 이상은 모두 철저한 고증을 거쳤다고. 즉,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의 '기타 분류 독립운동'의 실체를 충분히 영화 '박열'로 당장 알 수 있는 것이다. 아마 영화 ‘박열’은 역사영화의 긍정적 기능 중 한 가지를 이행하는 데 성공한 것 같다. 아무도 모를 법한 인물을 영화적으로 재미있게 그려 대중에게 소개하는 기능.

 

윤동주와 송몽규

우리는 독립운동의 행위를 넓게 바라볼 필요가 있다. 물론 무장투쟁이나 계몽운동 심지어 박열의 기개까지 눈으로 드러나는 직접적인 독립운동이 있었기에 해방을 맞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외에 참회, 반성, 저항 등의 감정을 문학에 담아 현재를 살아가는 후손들에게 큰 울림을 준 독립운동의 갈래도 존재한다. 윤동주가 그러했다.

우리는 그동안 윤동주를 현재까지 남겨진 사진과 그의 시로 만나왔다. 그래서 그의 문학적 순수성은 느껴왔을지 몰라도 다소 정적인 느낌에 그친 건 사실이다. 이 한계에 이준익 감독은 영화 '동주'를 만들어 대중들에게 윤동주가 어떻게 살아오고 어떤 감정으로 시를 창작했는지 알려주었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윤동주가 시를 창작하는 데 있어 아주 결정적인 역할을 한 윤동주의 사촌형제 송몽규까지 재조명했다.

▲ (사진: 오른쪽-네이버 영화·루스 이 소니도스·플러스엠)
▲ (사진: 오른쪽-네이버 영화·루스 이 소니도스·플러스엠)

어쩌면 '신의 한 수'였다고 생각한다. '동주'가 흑백으로 만들어진 것이. 흑백의 감성은 윤동주의 문학 정신, 송몽규의 투쟁 정신을 흘림 없이 전부 표현됐다. 서사 전개에서도 '동주'는 훌륭했다. 만주 북간도에서부터 연희전문학교(현 연세대), 일본을 거쳐 죽음을 맞이한 후쿠오카 형무소까지 '동주'만 보더라도 윤동주의 송몽규라는 인물을 이해하는데 부족함이 없었다. 중간중간 삽입돼있는 세상을 향한 송몽규의 절규, 윤동주의 시 낭독은 한껏 영화 '동주'의 아름다움을 높여주었다.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누가 뭐래도 우리가 다시 한 번 '동주'라는 영화로 윤동주와 송몽규를 또렷이 기억할 수 있었던 이유에는 강하늘·박정민 배우의 탁월한 연기가 한 몫했다. 어떠한 목적으로도 좋다. 독립운동을 알고 위해서든, 흑백영화의 매력을 느끼고 싶어서든, 강하늘과 박정민의 대표작을 알고 싶어서든, 이준익 감독의 뛰어난 연출을 감상하고 싶어서든 '동주'는 다시 볼만한 영화다.

 

유관순

김구만큼이나 독립운동에 있어 가장 유명한 인물, 3·1절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물은 부정할 수 없이 유관순이다.

그럼에도 한국영화계는 유관순이란 인물에 대해 소극적이었다. 단순히 유관순이 우리 국민들로부터 존경받는 독립운동가라지만 김구처럼 영화화할 소재가 뚜렷해야 제작할 수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 소극적 기류 끝에 3·1절 100주년을 맞이하야 2019년 2월 27일 '항거: 유관순 이야기'가 개봉됐다.

▲ (사진: 오른쪽-네이버 영화, 디씨지플러스, 롯데엔터테인먼트)
▲ (사진: 오른쪽-네이버 영화, 디씨지플러스, 롯데엔터테인먼트)

제일 먼저 대중들이 궁금해 한 점은, 과연 누가 유관순이란 인물을 맡았는가였다. 유관순 역을 맡은 배우가 알려지자 대중들은 맞아떨어지는 싱크로율에 대부분 긍정했다. '항거: 유관순 이야기'에서 유관순 역은 배우 고아성이 맡았다. 고아성의 얼굴과 유관순의 인상은 묘하게 닮아 그야말로 당시 고초를 겪던 유관순을 우리가 옆에서 바라보는 것만 같았다. 그에 더해 고아성만의 탄탄한 연기력은 유관순이란 인물에 전혀 흠이 되지 않았다. 옥 안에서 같이 버텨가는 여성 수감 동기들과 함께 만세를 부르는 장면, 일본 교도관으로부터 혹독한 고문을 받는 장면, 처연한 표정으로 수감 사진을 찍는 장면 등을 보면, 고아성이 유관순이었고 유관순이 고아성이었다.

총 촬영 기간이 1달가량 밖에 되지 않아 영화 자체의 매끄러움은 부족했지만 최소한의 의미는 가진 영화였다. 유관순이란 인물을 영화라는 방법으로 다시 살려내는 데 성공했다는 점, 유관순은 어떤 정신으로 독립운동에 참가했는지를 알렸다는 점 등. 감히 '항거: 유관순 이야기'는 3·1절에 감상하기 가장 적합한 영화가 아닐 수 없다.
 

 

많다

영화산업의 관점으로 봤을 때, 영화화 시도될만한 독립운동가들은 많다. 신채호, 한용운, 김좌진, 안창호 등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독립운동가들도 즐비하다. 반대로, 꼭 유명한 독립운동가에 의존하지 않아도 된다. 우리가 잘 모르지만 숨어있는, 그러면서도 영화화하기에 적합한 인물이나 사건도 충분히 많다. 

한국영화계는 부디 망설이지 않길 바란다. 보다 적극적으로 선정하고 검토하여 보다 많이 독립운동에 대해서 영화화해주길 바란다. 단, 영화 창작 허용을 넘는 역사 왜곡이나 수준 이하의 연출을 동반하지 않겠다는 약속은 하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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