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3년이나 지났다. 3월 31일은 무한도전이 종영된 지 3년째 되는 날이다. 시간이 유독 빠른 것 같다. 종영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데 육군 사병 2명이나 전역했을 기간인 3년이나 지났다니.

국내 OTT 플랫폼 웨이브에서는 매주 주간 랭킹을 공개해 이용자들이 어떤 프로그램을 주로 보는지 알려준다. 떠난 지 3년이나 지났음에도 가장 최근 순위인 2021년 3월 3주 예능 랭킹 3위에서 무한도전의 이름을 확인할 수 있다.

▲ (사진: 웨이브 공식 네이버 포스트)
▲ (사진: 웨이브 공식 네이버 포스트)

현재까지 명확하게 이어지는 무한도전의 영향력을 그저 재밌었다는 이유만으로 단순화시킬 수 있을까? 재미 이상의 의의들을 무한도전은 남겼고 그 의의에 현재 예능들이 분명한 영향을 받았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예능으로 시청을 돌렸는데도 무한도전의 잔상이 남아있는 것이다. 

2005년부터 2018년까지 13년의 여정에서 무한도전은 어떤 유산을 남겼길래 현재까지 대중들의 선택을 받는 것일까.

 

 

떼샷

무한도전이 첫 방송된 2005년 4월 23일, 이 때만 해도 유재석 1인 프로그램의 느낌이 강했다. 오프닝 영상에서도 유재석만이 사진으로 얼굴을 드러냈다. 후에 "사실 '유재석의 무모한 도전'"이었다고도 하하가 말했다. 유재석 중심으로 옆에 정형돈과 노홍철이 있었고 다른 출연진들은 도전하는 과제에 맞게 교체되곤 했다.

▲ (사진: 무한도전 '가을 소풍' 특집 방송 캡처)
▲ (사진: 무한도전 '가을 소풍' 특집 방송 캡처)

'무모한 도전'을 거쳐 '무리한 도전'도 마치고 본격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무한도전'이 됐다. 그리고 하하와 정준하가 합류하면서 6인 체제가 완성됐다. 비로소 '떼샷 버라이어티' 무한도전이 시작된 것이다. 

2005년 전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예능은 메인 MC 한 두 명을 세우고 그 옆에 게스트들로 채우는 방식이었다. 이 틀을 무한도전은 깬 것이다. 무려 고정을 6명이나 두고 그 안에서 멤버들 간의 케미를 터트리고 단합을 선보였다.

이러한 무한도전의 획기적인 시도는 초반엔 다소 부작용을 낳기도 했다. 6명이 단체로 떠들어대니 시끄럽다거나 집중이 잘 안 된다는 식의 혹평도 있었다. 하지만 무한도전에 이어 '1박 2일', '런닝맨', '남자의 자격', '문제적 남자', '기막힌 외출', '대탈출' 등 여러 주류 예능들이 떼샷 버라이어티의 형태를 취해 각 채널의 대표 예능으로 거듭나는 동시 고유의 정체성을 지켜나갔다.

▲ (사진: 무한도전 '조금 더 보고싶다 친구야' 특집 방송 캡처)
▲ (사진: 무한도전 '조금 더 보고싶다 친구야' 특집 방송 캡처)

근간부터 획기적이었던 것이다. 예능에 있어 출연진의 배치와 진행은 가히 필수적인데, '떼샷 버라이어티'라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방식을 꺼내 들어 후대 예능에까지 지대한 영향을 끼친 무한도전의 존재감을 부정할 수는 없다.

 

리얼

모든 방송에는 대본이 있다. 드라마든 다큐멘터리든 예능이든. 심지어 뉴스도 사전 원고가 있다. 각 방송 장르의 작가들은 촬영을 이끌 대본을 만들어놓는다. 그 대본에 따라 출연진들은 맞춰 행동한다. 이것이 방송의 아주 기초적인 골자다. 그러나 이 골자마저 무한도전은 혁파했다. 도저히 사전에 연출진과 작가들이 만들 수 없는 대본 범주 외 전개로 무한도전은 '리얼 버라이어티'의 매력을 선보였다. 

▲ (사진: 무한도전 '무인도' 특집 방송 캡처)
▲ (사진: 무한도전 '무인도' 특집 방송 캡처)

방송의 시작을 '일찍 와주길 바라'라는 이름으로 지각 체크를 단행하기도 했다. 아무도 없는 무인도로 가서 맨몸으로 야자를 따먹다가 노홍철은 상처를 입기도 했다. '무모한 도전' 때처럼 기네스에 도전하기도 했다. 'Yes'와 'No'만을 선택해 정형돈은 마라도까지 갔지만 짜장면을 먹지 못 하기도 했다. 알래스카로 가서 무작정 김상덕 씨를 찾기도 했다. 재활의학과 김동환 교수와 박명수는 하루의 삶을 바꿔 살기도 했다. 시청자의 기획안으로 에피소드를 꾸미기도 했다. 실제 시민 대상으로 선거를 치러 리더를 뽑기도 했다. 각 예술 분야에 멤버의 24시간을 경매에 붙이기도 했다. 정준하는 실제로 '쇼미더머니 5'에 도전하기도 했다. 국회의원들과 국민을 한 자리에 모아 토론의 장을 마련하기도 했다. 특정 상황 1시간 전에 내던져져 극복하기도 했다. 이렇듯 무한도전 매년 쉬지 않고 리얼 버라이어티의 진면목을 직접 입증해왔다.

▲ (사진: 무한도전 '인생극장 Yes or No' 특집 방송 캡처)
▲ (사진: 무한도전 '인생극장 Yes or No' 특집 방송 캡처)

방송과 시청자의 간극은 문명의 발달로 서서히 줄어들고 있다. 과도하게 대본에 의지하면 시청자들은 단숨에 인위성을 느끼고 시청을 그만둔다. 이 과정을 무한도전은 일찍이 알아본 듯하다. 대강 촬영의 방향은 정해주고 그에 맞게 멤버들의 역량으로 알아서 진행되게끔 혹은 멤버들 이외의 인물도 충분히 방송에 재미를 줄 수 있게끔 가능성을 열어두었다. 

그렇게 무한도전은 리얼 버라이어티의 매력을 제대로 알렸고, 현 예능에 리얼함이 핵심 요소로 자리 잡게끔 선도했다.

 

장르물

무한도전은 일관된 형태가 없다. 굳이 형태라고 해봐야 고정적인 출연진뿐? 이외에는 매번 새로운 특집과 에피소드를 이행했다. 그렇다 보니, 무한도전은 시도에 있어 제약이 거의 없었다. 할만한 소재가 있다면 일단 저지르고 봤다. 

▲ (사진: 무한도전 '돈가방을 갖고 튀어라' 특집 방송 캡처)
▲ (사진: 무한도전 '돈가방을 갖고 튀어라' 특집 방송 캡처)

소재의 범위는 다양했다. 80~90년대 코미디 프로그램과 흡사한 콩트, 비인기 종목에 도전했던 스포츠물, 새로이 각본까지 만들어 진행한 드라마, 상황극을 발전시킨 영화까지. 결과적으로 무한도전은 시도할 때마다 단순 오락이라는 장르에서만 그친 것이 아닌 복합적인 방향으로도 뻗쳐나간, '장르물'이 예능 방송에서도 충분히 된다는 가능성을 보여줬다.

만약, '좀비특집 28년 후'에서의 좀비 예능 연출 시도가 없었다면 '대탈출'에서 좀비 유니버스를 쉽게 만들어질 수 있었을까? '돈가방을 갖고 튀어라'에서 추격전을 시도하지 않았다면 SBS 간판 예능 '런닝맨'이 존재할 수 있었을까?  5년에 걸친 무한도전 가요제들이 없었다면 이후 생긴 음악 예능들이 힘을 받을 수 있었을까?

▲ (사진: 무한도전 '좀비특집 28년 후' 특집 방송 캡처)
▲ (사진: 무한도전 '좀비특집 28년 후' 특집 방송 캡처)

무한도전은 매회 새로운 소재에 대한 '무한도전'을 멈추지 않았으며, 그 결과적으로 '장르물'에 대한 가능성을 모든 방송계에 알렸다. 그리하여 현재 우리의 감각을 풍족하게 해주는 다양한 장르의 예능들이 자신감을 갖고 제작될 수 있었다.

 

새 얼굴

매번 새로운 특집과 에피소드에 임하는 무한도전의 진행에서 장르물에 대한 가능성만 확인했을까. 아니다. 새로운 예능 인재들에 대한 가능성도 동시에 확인하고 시청자들에게 소개해줬다.

▲ (사진: 무한도전 '영동고속도로 가요제' 진행 과정에 첫 방송 출연한 유재환)
▲ (사진: 무한도전 '영동고속도로 가요제' 진행 과정에 첫 방송 출연한 유재환)

베이시스의 멤버이며 故서지원의 대표곡 '내 눈물 모아'의 작곡가이자 영화음악 감독으로만 알고 있던 정재형은 2011년 '서해안 고속도로 가요제'에서 뛰어난 존재감을 보여 당시 무한도전의 동시간대 경쟁 프로그램 '불후의 명곡 전설을 노래하다'의 고정 MC로 발탁되기도 했다.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외모로 '못·친·소 1'의 최대 수혜자가 된 기타리스트 조청치 역시 숨겨져 있던 예능감을 입증받아 여러 프로그램에서 활약하고 라디오 프로그램 고정까지 꿰차기도 했다. 

아이유를 보자마자 흥분과 웃음을 감추지 못 하던 음악 프로듀서 유재환 역시 무한도전에서 얼굴을 비춘 후 꾸준히 방송계에서 좋은 모습을 보이고 있다. 

'코리안 돌+아이' 특집에서 '상돌아이'로 주목을 받은 신동훈은 현재 구독자 120만 명을 자랑하는 인기 유튜버로 활동 중이다.

▲ 'Korean Dol+i' 특집에 출연했던 신동훈
▲ 'Korean Dol+i' 특집에 출연했던 신동훈

즉, 무한도전은 고정 멤버들끼리만 노는 '느그 예능'이 아니었다. 6명만으로 활약하여 채워낸 특집도 있었지만 위의 인물들처럼 새로운 얼굴도 무한도전에 얼굴을 비출 수 있는 '열린 예능'이었다. 

스포츠계에서만 존재하는 개념일 줄 알았던 '세대교체', '신예발굴'이 예능계에도 적용될 줄은. 이를 무한도전이 담당했을 줄은.

 

상술한 요소들이 현재 예능가에 충분한 영향을 주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위 요소들보다 보다 확실하게 무한도전이 현재까지 잊히지 않는다는 가시적 증거는 대한민국 문화계에 한 획을 그었었던 '밈'들에서 찾을 수 있다.

박명수는 어쩌다가 정준하를 '쩌리짱'으로 호명했다. 그 순간 정준하는 '쩌리짱'이 됐다. 방송 직후 각종 포털 사이트의 검색어 순위 1위를 기록하기도 했다. 그냥 정준하는 정준하가 아니라 '쩌리짱'이 됐다. 

▲ (사진: 무한도전 '유혹의 거인' 특집 방송 캡처)
▲ (사진: 무한도전 '유혹의 거인' 특집 방송 캡처)

노홍철이 음주운전으로 하차하게 되고 무한도전은 2014년 말 잠시 5명이 된 적이 있다. 경각심을 위해 유재석은 녹화 전 날 멤버들은 음주를 할 것인가라는 궁금증으로 '유혹의 거인'이라는 특집을 마련했다. 포위망에 걸려든 정형돈을 향해 유재석이 깜짝 등장하자 정형돈은 해맑은 표정을 짓고 그 순간 자막은 '형이 왜 거기서 나와?'였다. 정형돈의 표정과 자막은 삽시간에 퍼졌으며 다른 예능, 뉴스 등에서 제한 없이 차용됐다. 심지어 영탁은 '니가 왜 거기서 나와'라는 곡을 발표해 '형이 왜 거기서 나와?' 밈의 정점을 찍었다. 

▲ (사진: 무한도전 '외박특집 오 마이 텐트' 특집 방송 캡처)
▲ (사진: 무한도전 '외박특집 오 마이 텐트' 특집 방송 캡처)

무한도전 밈은 역주행도 했다. 2010년 유재석·정형돈·노홍철이 김상덕 씨를 찾으러 알래스카로 떠난 '외박특집 오 마이 텐트'에서 무한도전을 "무~야호~"로 잘못 외치신 최규재 할아버지는 2021년 현재 짤방계의 슈퍼스타로 '최고존엄'하고 계시다. 

밈은 일종의 놀이다. 그냥 가지고 노는 것이다. 타인과 대화를 할 때 색다르게 표현하고 싶어 밈을 끌어다 쓰기도 한다. 재밌다 싶으면 새로운 밈을 만들어내 퍼트리기도 한다. 무한도전은 시대를 이어 광활한 범위의 대중이 가지고 놀만한 밈들을 다수 만들어냈다. 아직까지도 대중들은 무한도전을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고 있다. 잊지 못 하고.

 

 

한국 예능은 무한도전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2011년 1월 1일 방송된 '2010 연말정산 뒤끝공제'에서 김성원 작가는 공식적으로 발언했다. "한국 예능은 무한도전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라고. 

▲ (사진: 무한도전 '2010 연말정산 뒤끝공제' 특집 방송 캡처)
▲ (사진: 무한도전 '2010 연말정산 뒤끝공제' 특집 방송 캡처)

이 발언이 온전히 김성원 작가 머리에서 나온 것은 아니다. 방송계는 물론 각종 인터넷 커뮤니티도 공공연하게 떠돌던 평가였다. 이 발언이 나왔을 때, 무한도전 멤버들은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당시 무한도전을 보고 있던 시청자들도 부끄러웠을까? 아니라고 본다. 왜? 단순히 흥행과 시청률의 의미를 넘어, 상술한 여러 의미들을 무한도전은 낳았고 그 유산을 직접 시청자들은 확인했기 때문이다. 예능 방송의 형태로든, 대중들이 즐길 수 있는 밈을 생산했든 무한도전 이후로 대한민국 예능이 발전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한편으론 바라본다. 무한도전이란 이름, 무한도전의 멤버 그대로는 아니더라도 무한도전에 버금가는 존재감을 가진 예능이 다시 등장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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