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31일 개봉한 '자산어보'는 코로나19로 인해 어려운 시기를 겪고 있는 극장가에 대중들을 끌어모을 수 있는 반가운 요소들이 여럿 담겨있다. 묵직한 연기로 신뢰감을 주는 설경구와 탁월한 표현력으로 차기 한국영화계를 이끌 준비를 끝낸 변요한의 만남이 새롭다. 또한, 상업영화로써 쉽게 시도되기 힘든 흑백영화기 때문에 눈길을 끈다.
그래도 결정적으로 '자산어보'가 세간의 이목을 끄는 더 큰 이유는 이준익 감독이 시대극을 다시 한 번 만들었다는 점이다. 대한민국 영화계에 시대극을 자신의 대표작으로 남게 한 감독들이 여럿 있다. '최종병기 활'의 김한민, '광해, 왕이 된 남자'의 추창민, '남한산성'의 황동혁 등. 그럼에도 이준익 감독이 시대극을 만든다는 소식이 들리면 다른 감독들이 비해 더욱 기대가 된다. 그 이유는 여러 차례 시대극을 만들어보기도 했고, 특히나 여러 시대극들에선 탄탄한 고증이 뒷받침하기 때문이다.
지난 3월 26일 SBS 월화 드라마 '조선구마사'가 역사왜곡과 친중논란으로 2회 만에 방송 폐지되는 초유의 사태를 맞았다. 이 충격적 사고가 채 가시기 전에 이준익의 시대극이 다시 개봉된다는 것, 참으로 운명적이다.
이준익은 어떠한 영화에서 어떠한 부분을 고증하여 시대극의 본질을 살렸는가. 이준익은 어떠한 영화에서 어떠한 부분을 창작해 예술품으로써의 영화적 본질을 살렸는가. 이준익은 어떻게 사실을 기반으로 한 창작 예술 '시대극 장인'이 됐을까.
왕의 남자
먼저, 영화 '왕의 남자'를 살펴볼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수식어는 '천만 관객 돌파 영화'다. '실미도'와 '태극기 휘날리며'에 이어 12,302,831명을 기록해 3번째로 천만 관객을 돌파했다. 제작비 약 110억 원의 '실미도', 약 170억 원의 '태극기 휘날리며'에 비해 약 71억 원만으로 더 많은 관객을 동원했다는 것은 어쩌면 진정한 의미에서의 '천만 관객 돌파 영화'로 봐도 무방할 것이다.
'왕의 남자'가 천만 관객을 동원할 수 있었던 여러 요소들 중, 반드시 언급돼야 할 요소가 극 중 배경인 조선 연산군대 시대상을 적절히 표현했다는 것이다. 특히, 극 중 인물들의 중심 직업인 광대들을 세밀히 고증했다. 떠돌아다녔던 광대들의 삶과 주로 음담패설로 웃음을 사며 근근이 먹고살았던 당시 현실 등을 납득이 될 수 있게 담았다. 이후 장생 패거리가 궁에 들어간 후 본격적인 광대극을 펼치는 광경 또한 고증에 충실했다고 평가받는다.
반면 어느 부분이 영화적 상상이 칠해졌을까? '왕의 남자' 포스터부터 확인할 수 있었고 영화 내내 색다른 느낌을 보였던 연산군의 곤룡포가 어둡고 푸른색을 띠고 있다. 중앙의 용문양 또한 은색에 가깝다. 이는 이준익 감독이 의도한 것이다. 우울하고 슬픈 인생을 살아온 연산군의 내적 감정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기 위해 변경했다고 밝혔다. 즉, 영화적으로 허용될 수 있는 창작이다.
이렇게 '왕의 남자'는 기반이 된 역사적 배경에 고증을 충실히 따르고 그 위에 영화 분위기를 고조하기 위하여 '의도적 왜곡'을 단행했다. 그 왜곡이 영화에 잘 묻어나고 영화 또한 그 왜곡의 결과물에 맞게 만들어졌으니 아무도 역사 왜곡 시비를 거는 사람이 없었다. 그리고 곤룡포 색 변경이 역사적 사건을 비틀어버리는 근본적 왜곡이 아니었기 때문에 관객들은 이해했다.
사도
'왕의 남자'로 명실상부 작품성과 흥행을 동시에 잡은 스타 감독의 반열에 올랐다. 이후 일곱 작품의 영화 연출을 거치고 다시 '사도'로써 조선왕조를 다뤘다. '사도'는 사도세자에서 따온 영화 제목이며 '임오화변'을 소재로 했다.
'사도'는 '임오화변'을 소재로 한 창작물 중에서 가장 높은 수준의 고증을 자랑한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애초에 사전 검열에 주로 조선시대 문화를 연구하는 정병설 교수가 참여했다. 또한, 조선왕조실록·승정원일기·한중록 등 기초적인 사료를 철저히 참고했기 때문에 높은 수준의 고증은 당연했다. 인원왕후가 숙의 문씨에게 회초리를 드는 장면, 사도세자의 방어진 결정에 영조가 간섭하는 장면, 사도세자가 정조 태몽을 꾸고 그림을 그리는 장면 등의 역사적 사실을 ‘사도’라는 영화의 극 전개에 맞춰 적절히 삽입했다. 이렇게 역사적 사실들을을 정확히 참고하여 창작물에 알맞게 배치한다는 것, 이 어려운 걸 이준익은 해냈다.
물론 '사도'에서도 창작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가장 두드러진 부분은 역설적이게도, 사도세자의 조현병 시절 악행을 역사적 사실에 비해 순화하여 묘사했다는 것이다. 영화 안에서는 사도세자가 조현병으로 미쳐버려 죽인 사람이 1명 밖에 묘사되지 않는다. 하지만 기록에 따르면 더욱 잔혹했다. 감정을 조절치 못 해 죽인 인원은 기록 상에만 100명이 넘는다고 알려졌으며, 궁녀와 비구니 등에게 끔찍한 성폭행을 일삼았고 자신의 정신병을 해소하기 위해 국고 또한 탕진하기도 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악행은 영화 안에서 그나마 순화돼 연출됐다. 사실과 달리 영화에 맞게 꾸민 것이니 이 것도 창작이라면 창작일 수도.
'사도'는 감히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교과서가 아닌 영조와 사도세자, 그리고 정조의 이야기를 높은 수준의 고증으로써 공부할 수 있는 또 다른 형태의 교과서라고. 단, 결국엔 창작물인 영화라는 이해 아래.
동주
'사도'에 이어 이준익 감독은 곧바로 시대를 옮겨 다시 시대극을 만들었다. 이준익 감독이 윤동주 시인을 소재로 영화를 만든다는 소식을 영화 개봉날이 다가와서야 대중들은 알게 됐다. 그만큼 이준익 감독은 '동주'를 만드는 데 있어 홍보 비용과 활동을 최소한으로 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동주'는 개봉했고 이준익 감독 연출 중에서, 흑백영화들 중에서, 시대극 영화들 중에서 손에 꼽을 명작이 됐다.
역시 '동주'도 철저한 고증에 기반한다. 시대극, 흑백, 독립운동 등의 키워드가 '동주'를 형용하기도 하지만 '전기'라는 키워드도 '동주'를 형용하면서 대표한다. 즉, '동주'에서 그려지는 두 주인공 윤동주와 송몽규는 실제 윤동주와 송몽규의 삶을 철저히 따랐다. 또한, 중간 등장하는 정지용 시인, 다까마쓰 교수의 행적까지 사실에 기반하여 표현했다. 그야말로 윤동주와 송몽규의 삶을 사실적으로 담은 전기 영화의 성격을 가지면서도 주변 인물까지 고증에 충실히 입각한 것이다. 그리고 영화 '동주'를 두 글자로 나타내는 타이틀마저 윤동주 시인의 필체에서 그려진 것이라고 하니 어찌 고증 오류 시비를 걸 수 있겠는가.
이렇게 고증을 철저히 따르면서도 이준익 감독은 영화 '동주'만의 생명력을 상상력으로 불어넣었다. 흑백이란 과감한 연출법으로 윤동주의 문학인으로써의 순수성, 송몽규의 혁명가로써의 단결함이 효과적으로 담겼다. 흑백임에도 눈에 선한 한반도의 자연 절경은 마치 움직이는 수묵담채화를 보는 듯했다. 이렇게 흑백만이 가지는 창조적 매력을 윤동주의 삶에 조화스럽게 얹어 영화 '동주'가 탄생한 것이다.
제작비가 단 5억 원이다. '조선구마사'는 알려진 제작비가 320억 원이다. '조선구마사' 하나로 '동주' 64개를 만들 수 있는 것이다. 어떤 작품은 역사왜곡을 일삼아 2회 만에 퇴출당하고, 어떤 작품은 적은 제작비로도 철저한 고증을 이뤄냈다. 창작물 안에서 고증이란 자본주의에 잠식 당해 놓칠 수 밖에 없는 것이 아닌 의지의 차이일지도 모른다.
박열
'동주'라는 명작을 만들어내곤 이준익 감독은 동시대를 다시 주목했다. 윤동주라는 시인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박열이란 인물은 전혀 알지 못 했다. 그렇게 생소한 독립운동가의 삶에 이준익 감독은 다시 한 번 고증을 시도하여 영화를 만들기 시작했다.
이준익 감독은 영화 개봉 전부터 '박열'은 실제 역사와 90% 이상 일치하다고 밝혀 고증에 대한 자신감을 내비쳤다. 역시 결과물 또한 그 자신감에 부합했다. 알려진 인물 박열의 기개, 박열을 지원하는 연인 가네코 후미코의 능청스러움 그리고 이러한 둘이 참석한 일본 재판의 재현까지. 당시 실제 영상물을 보는 것인지 창작된 영화를 보는 것인지 구분이 쉽지 않을 정도였다. 동아일보에 실린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의 사진을 영화 '박열'에선 이제훈과 최희서의 얼굴을 빌려 거의 흡사하게 고증 복원했다. 재판에 조선 관복을 입은 박열의 기행까지 영화는 영화의 방법론을 빌려 익살스럽게 고증 복원했다. 충분히 이준익 감독이 자신감을 내비출만했다.
물론 영화 전체를 고증하는 건 불가능하다. 가네코 후미코와 박열이 만나는 과정은 창작이 가미됐다. 창작이래도 두 인물이 교감하는 과정은 가네코 후미코와 박열이라는 인물이기에 가능한 로맨스로 보였다. 이준익의 창작 아래 '박열' 안에서 가네코 후미코와 박열은 동거인(?)이 되고 죽음이 이를 때까지 정서적으로 함께 했다.
즉, '박열'은 이준익 감독의 머릿 속에서 그려진 가네코 후미코와 박열의 창작 로맨스로 시작해 철저한 고증이 뒷받침된 역사 서사로 이어졌다. 독립운동 시기 박열과 카네코 후미코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를 영화적으로 적절히 표현된 것이다. 시대극에 있어 충실한 고증이 기반된다면 작품의 주제 의식은 더욱 뚜렷해진다는 것을 영화 '박열'은 증명했다.
이래서 시대극이 어렵다
시대극은 본질적으로 결과가 정해져 있다. 모두가 아는 역사적 결과를 어떻게 재해석하여 새로운 예술을 만들었는지가 관건이다.
여기서 주의해야할 점은, 재해석을 '왜곡 허용'으로 잘못 이해하면 안 된다. 앞서 짚어본 이준익의 시대극들은 쓰여진 역사적 사실에 창작을 더한 방식이었다. 하지만 '조선구마사'는 달랐다. '조선구마사'는 쓰인 역사적 사실마저도 바꿔버렸고, 그 바꾼 역사마저도 시대상의 근간을 흔드는 '창작' 아닌 '왜곡'이었다. 이 차이에서 이준익의 시대극과 '조선구마사'의 운명이 갈렸다.
어느 예술가던 새로운 예술을 자신의 손으로 온전히 창작하고 싶어 한다. 이 것은 예술의 가장 기초적인 본능이다. 역사적 결과가 정해져 있어 창작의 폭이 비교적 좁은 시대극을 다룰 때는 이 본능을 조심히 발산해야 한다. 그럴 맘이 없다면, 분위기만 차용하고 모든 것을 새로이 만들어야 한다. 대체역사물의 명작 '킹덤'처럼 말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래서 시대극이 어려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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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극 좋아하는데 자산어보 기대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