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투기의 역사를 구체적으로 따져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대략적으로 종합격투기의 역사를 어느 시점이라고 구분해야 할까? 프로레슬링과 종합격투기의 중간지점에서 시작한 것이라는 시각이 존재하지만, 현재는 분명한 종합격투기 단체로 분류되고 있는 일본의 슈토가 창설된 1985년을 종합격투기의 시작이라 보는 것이 편리할 것이다. 

1985년부터 2021년까지 세계 종합격투기 역사는 약 36년이 흘렀다. 그 36년 동안 종합격투기 세계에는 수많은 선수들이 오고 갔다. 그 선수들은 각자의 서사를 가지고 경기를 가졌으며 그 서사들이 섞이는 과정에서 세계 모든 격투 팬들이 주목하는 '세기의 대결'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 5번이나 불발됐고, 최후의 '세기의 대결'이라 기대 받았던 하빕 누르마고메도프와 토니 퍼거슨의 대결 (사진: 에센셜리스포츠, CBS 스포츠)
▲ 5번이나 불발됐고, 최후의 '세기의 대결'이라 기대 받았던 하빕 누르마고메도프와 토니 퍼거슨의 대결 (사진: 에센셜리스포츠, CBS 스포츠)

'세기의 대결'은 단순히 유명한 선수들끼리 경기를 가지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챔피언과 도전자의 입장이더라도 누가 이길지 쉽게 가늠이 가지 않는, 정점에 서있는 두 선수들끼리 만났을 때 '세기의 대결'이라 칭한다. 아니면, 상당한 상징성을 가진 두 선수가 결국 맞붙게 됐을 때도 '세기의 대결'이라 형용한다.

약 36년의 역사를 가진 종합격투기의 흐름 속에서 '세기의 대결'이라 명명해도 부족함이 없는 경기가 몇 차례나 있었을까? 과연 그 경기들은 어떤 서사로 어떤 결과로 어떤 의미로 '세기의 대결'이라 당당히 기억될까?

 

 

'세기의 대결'의 대명사

예멜리야넨코 표도르 vs 미르코 '크로캅' 필리포비치 

이제는 사어(死語)가 됐지만 '이종격투기'로 가장 유명했던 단체는 일본의 K-1이다. K-1은 어네스트 후스트, 제롬 르 밴너, 피터 아츠, 앤디 훅, 세미 쉴트, 레미 본야스키, 레이 세포, 바다 하리 등 스타 선수들을 여럿 배출하며 세계적 이종격투기 단체로 성장했다. 1990년대 말 K-1 스타 계보를 이은 자가 미르코 '크로캅' 필리포비치였다. 미르코 '크로캅' 필리포비치는 발전을 위해 입식 타격 경기가 주였던 K-1에서 종합격투기로 선회해 당시 일본 제1의 종합격투기 단체 프라이드 FC로 이적했다. 미르코 '크로캅' 필리포비치는 2003년부터 2005년 8월까지 무려 14경기를 뛰며 자신을 입증했고 계속해서 예멜리야넨코 표도르의 프라이드 FC 헤비급 타이틀을 노렸다.

예멜리야넨코 표도르는 미르코 '크로캅' 필리포비치과 달리 시작부터 종합격투기의 길을 걸었다. 일본 마이너 종합격투기 단체 링스에서 착실히 경험을 쌓고 프라이드 FC에 진출해 단 세 경기만에 당시 프라이드 FC 헤비급 챔피언 안토니오 호드리고 노게이라를 꺾어 새로운 프라이드 FC 헤비급 챔피언에 올랐다. 그리고 왕좌의 위치에서 미르코 '크로캅' 필리포비치가 자신을 향해 다가오고 있음을 지켜봤다.

아마 2005년은 우리나라에서도 가장 격투기가 흥행한 해로 기억될 것이다. K-1에서도 최홍만이 지역예선을 뚫고 K-1 WGP 16강에서 밥 샙을 꺾어 K-1 WGP 8강까지 진출했으니 말이다. 이러한 최홍만의 활약에 더해 2005년 프라이드 FC 인기 정점을 찍어준 '세기의 대결'이 바로 예멜리야넨코 표도르와 미르코 '크로캅' 필리포비치의 프라이드 FC 헤비급 타이틀전이었다. 당시 프라이드 FC를 국내에 방송해주던 채널 XTM은 서울 명동 중앙시네마극장에서 동시 생중계를 펼치는 등 국내 격투기 인기를 실감케 했다.

▲ (사진: 셔독)

어느 한 쪽으로 승자 예상이 쏠리지 않던 예멜리야넨코 표도르와 미르코 '크로캅' 필리포비치의 프라이드 FC 헤비급 타이틀전은 예멜리야넨코 표도르의 3:0 판정승으로 끝을 맺었다. 두 선수는 경기 내내 긴장감을 유지하며 서로의 극에 달한 타격 스피드를 주고받다가 2라운드 이후 예멜리야넨코 표도르가 체력에서 우위를 점하고 포지션도 유리하게 끌고 가 승리의 무게추를 자신 쪽으로 끌고 왔다. 

이후, 프라이드 FC는 2006년 무차별급 그랑프리를 개최하며 우승 시 예멜리야넨코 표도르에게 도전할 기회를 준다고 공표했다. 미르코 '크로캅' 필리포비치가 우승을 차지했지만 2007년 새해가 밝자마자 UFC로 이적하여 예멜리야넨코 표도르와 미르코 '크로캅' 필리포비치의 2차전은 볼 수 없게 됐다.

아마 격투기 역사 상 가장 대표적이고 유명한 '세기의 대결' 일 것이다. 도전을 향한 미르코 '크로캅' 필리포비치의 여정, 최강의 도전자에게 최강의 실력으로 최강의 자리를 내주지 않은 예멜리야넨코 표도르, 이 '세기의 대결'을 완벽하게 장식한 프라이드 FC의 연출이 구성한 완벽한 3박자는 16년이 지난 지금도 이 둘의 대결을 추억하게 만든다.

 

일본판 '표도르 vs 크로캅'

고미 타카노리 vs 사쿠라이 '마하' 하야토

세계 종합격투기 역사 있어 가장 큰 흥행을 주도한 단체를 꼽으라면 UFC와 프라이드 FC다. 2007년 UFC가 프라이드 FC를 흡수해 그 이후로는 UFC가 세계 종합격투기 시장을 독점하는 체제로 굳어졌지만 2006년까지 UFC와 프라이드 FC의 영향력은 거의 대등했다.

세계 종합격투기 시장을 양분했던 프라이드 FC의 전성기는 부정할 수 없이 2005년이다. 앞서 짚어본 예멜리야넨코 표도르와 미르코 '크로캅' 필리포비치의 서사의 결말 역시 2005년이었고, 프라이드 FC의 질적 수준이 가장 높았던 시기 역시 2005년이었다. 

흥행으로 승승장구하던 프라이드 FC는 체급 확장을 꾀했다. 프라이드 FC의 흥행을 주로 이끌던 체급은 미들급(약 93kg 이하)과 헤비급(약 93kg 이상)이었다. 프라이드 FC는 일본에서 주로 흥행을 개최하던 단체였다. 두터운 인프라를 자랑했지만 대부분의 자국 선수들이 미들급과 헤비급에 속하지 못 했다. 그리하여 프라이드 FC는 라이트급(약 73kg 이하)과 웰터급(약 83kg 이하) 신설하고 체급의 챔피언을 가리기 위한 8강 그랑프리를 개최했다.

▲ '남제 2005'에서 프라이드 FC 2005 라이트급 그랑프리 결승전을 치르고 있는 사쿠라이 '마하' 하야토(왼쪽)와 고미 타카노리(오른쪽) (사진: 아시안 MMA)
▲ '남제 2005'에서 프라이드 FC 2005 라이트급 그랑프리 결승전을 치르고 있는 사쿠라이 '마하' 하야토(왼쪽)와 고미 타카노리(오른쪽) (사진: 아시안 MMA)

2005년 9월 25일 프라이드 FC는 '무사도 9'를 개최해 8명의 라이트급·웰터급 선수들로 그랑프리를 개최해 2005년 12월 31일 ‘남제 2005’에서 결승전을 치를 계획을 밝혔다. 특히, 라이트급에서 프라이드 FC의 의도한 결과가 나왔다. '일본판 예멜리아넨코 표도르'라 불리던 고미 타카노리는 8강에서부터 숙명의 라이벌이라 평가받던 카와지리 타츠야를 꺾고 4강에선 루이스 아제라도를 혈투 끝에 승리해 결승 진출에 성공했다. 반대편 블록에선 '슈토 4대천왕'이라 불리던 관록의 강자 사쿠라이 '마하' 하야토가 젠스 펄버, 요아킴 한센 2인의 외인 강자를 전부 꺾어 고미 타카노리와의 '세기의 대결'을 예고했다.

사쿠라이 '마하' 하야토는 1996년부터 종합격투가로 활동해 잔뼈가 굵은 일본 경량급의 대선배격 선수였다. 고미 타카노리는 2004년 프라이드 FC에 입성해 1패도 겪지 않은 당시 세계 라이트급 랭킹 1위 선수였다. 일본 경량급을 떠받치고 있던 사쿠라이 '마하' 하야토와 고미 타카노리가 프라이드 FC가 가장 공들여 준비하는 연말 대회 '남제 2005'에서 라이트급 그랑프리 결승을 가진다니, 가히 '세기의 대결'이라 부르지 않을 수 없었다.

경기 양상 역시 수준 높았다. 사쿠라이 '마하' 하야토가 전매특허 유도식 테이크다운 시도했지만 적절히 방어해내고 유리한 백포지션을 장악한 고미 타카노리는 뒤에서 사쿠라이 '마하' 하야토의 머리를 계속해서 공격했다. 스탠딩 되자마자 고미 타카노리의 스트레이트가 사쿠라이 '마하' 하야토의 안면에 적중해 경기가 끝났다. 너무 실력이 대등한 선수들이 만나면 서로 견제해 볼 것 없는 승부가 종종 일어나곤 하는데, 고미 타카노리와 사쿠라이 '마하' 하야토의 '세기의 대결'은 그렇지 않았다. 둘은 이번 경기로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경량급 종합격투기의 매력을 다시 깨달으라고.

 

UFC vs 프라이드 FC

척 리델 vs 반더레이 실바

앞서 말했듯이, 2006년까지 세계 종합격투기를 UFC와 프라이드 FC가 양분하고 있었다. 2007년 프라이드 FC가 도산했대도 그 혼마저 말끔히 사라졌을까? 아니다. 프라이드 FC 주축 선수들은 UFC로 옮겨 선수생명을 이어갔고 프라이드 FC의 상징과도 같았던 반더레이 실바 역시 UFC로 활동 무대를 옮겼다.

반더레이 실바는 브라질 국적 선수다. 그럼에도 일본 중심 종합격투기 단체 프라이드 FC 역사 전체를 통틀어 진주인공이라 불려도 부족함이 없을 선수로 존재했다. 브라질 그레이시 가문을 사냥하던 사쿠라바 카즈시를 3번이나 때려눕히며 사쿠라바 카즈시를 밀어내고 직접 프라이드 FC 흥행 중심에 섰다. 반더레이 실바 등장음악 'Sandstorm'이 울리면 일본 어느 지역에서 대회가 열리든 엄청난 환호는 기본이었다. 그렇게 반더레이 실바는 프라이드 FC 도산 후 UFC로 이적해도 프라이드의 혼을 간직했다.

프라이드 FC에 반더레이 실바가 있다면 UFC에는 척 리델이 있었다. UFC도 초기 프라이드 FC와 마찬가지로 라이트헤비급(약 90kg 이하)과 헤비급(약 90kg 이상)이 흥행을 주도했다. 2000년대 UFC는 현재와 같이 선수층도 두텁지 않고 체급도 세분화돼있지 않아서 몇몇의 선수들에게 흥행을 기대곤 했다. 특히, 라이트헤비급은 랜디 커투어, 티토 오티즈, 척 리델 이 트로이카가 UFC의 흥행을 선도했다. 척 리델은 랜디 커투어와 티토 오티즈를 2연속으로 꺾어 진정한 UFC의 얼굴이 됐고 2007년 프라이드 FC 선수들의 이적 러시를 맞이했다.

▲ (사진: UFC.com)
▲ (사진: UFC.com)

반더레이 실바나 척 리델이나 서로 만나기 직전 2연패를 당하고 있었던 터라 분위기 반전이 필요했다. 분위기 반전을 위해선 상징성이 큰 선수에게 승리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다. 즉, 2007년 말 반더레이 실바와 척 리델은 서로가 필요했다. 그렇게 UFC 79에서 프라이드 FC의 혼 반더레이 실바와 UFC의 혼 척 리델이 맞붙었다.

결과는 중요하지 않았다. 옥타곤에서 반더레이 실바와 척 리델이 눈빛을 교환했다는 것 자체가 중요한 것이다. 이건 단지 반더레이 실바와 척 리델 두 선수 간의 대결이라고만 한정할 수 없는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종합격투기 세계를 양분하던 프라이드 FC와 UFC가 선수로 대표하여 진검승부를 벌이는 것이다. 타격가답게 반더레이 실바와 척 리델은 3라운드 내내 주먹을 섞었다. 비교적 리치가 짧은 반더레이 실바는 계속해서 전진 스텝을 밟으며 주먹을 뻗었다. 척 리델은 아웃파이팅을 유지하며 긴 리치를 활용해 돌격하는 반더레이 실바에게 카운터를 날렸다. 결국 척 리델이 승리를 가져갔다. 반더레이 실바보다 척 리델이 효과적으로 타격을 적중시켰기 때문이었다. 

단체의 상징성을 가장 짙게 지닌 두 선수가 맞붙을 일이 앞으로 있을까? 종합격투기 역사상 가장 역사적인 '세기의 대결'이었다. 

 

일본 종합격투기 역사 그 자체

타무라 키요시 vs 사쿠라바 카즈시 

세계 종합격투기 중심은 미국과 일본이다. 지금 제1의 종합격투기 단체 UFC가 있는 미국은 부정할 수 없는 종합격투기의 '현재'다. 일본은 '과거'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대부분의 종합격투기 선수들은 주로 일본에서 활동하고 이름값을 높였다. 즉, 종합격투기에 관심이 있다면 일본 종합격투기 역사를 인지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일본 종합격투기의 시작은 프로레슬링이다. 1980년대부터 일본 프로레슬링계에선 보다 실전에 가까운 프로레슬링을 고안해보자는 의도로 실전 지향 프로레슬링 단체 UWF(Universal Wrestling Federation)가 출범했다. UWF 이후 슈토를 시작으로 딥, 판크라스, 링스 등 마이너 종합격투기 단체가 탄생했고 끝까지 UWF의 존속을 외치던 U계 프로레슬링의 고독한 계승자 타무라 키요시는 타 단체로의 이적을 거부하며 UWF 프로레슬링 계보를 이었다.

UWF에는 타무라 키요시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UWF 선배 다카다 노부히코를 따라 프라이드 FC 출범에 힘을 보태고 UFC 재팬 대회에서 우승과 동시 "프로레슬링은 사실 강합니다!"라는 명언을 남기며 종합격투기로의 진출을 꾀하던 사쿠라바 카즈시도 있었다. 사쿠라바 카즈시는 이후 프라이드 FC에서도 선배 다카다 노부히코를 농락하던 브라질 그레이시 가문을 톡톡히 복수해가며 프라이드 FC를 넘어 일본 격투기의 영웅으로 성장했다.

▲ 'K-1 다이너마이트 2008'에서 다시 만난 타무라 키요시(왼쪽)과 사쿠라바 카즈시(오른쪽) (사진: 아시안 MMA)
▲ 'K-1 다이너마이트 2008'에서 다시 만난 타무라 키요시(왼쪽)와 사쿠라바 카즈시(오른쪽) (사진: 아시안 MMA)

세월의 흐름을 누구도 거역할 순 없는 법. 타무라 키요시는 무너져가는 UWF를 혼자만의 힘으로 막을 수 없어 사쿠라바 카즈시와 같이 프라이드 FC 등의 실전 종합격투기로 진출한다. 둘의 입지는 예전과 많이 달라져 있었다. 이미 국민적 스타가 된 사쿠라바 카즈시, 고지식한 UWF의 계승자일 뿐이었던 타무라 키요시였다. 대외적으로 일본 격투기 그 자체가 된 사쿠라바 카즈시와 일본 격투기 뿌리의 산증인 타무라 키요시의 존재는 둘만 서사로도 의미가 깊었으며 이 둘의 대결을 세계 격투기 팬들은 내심 고대하고 있었다.

프라이드 FC 프로듀싱을 맡았던 타니가와 사다하루는 프라이드 FC가 도산하며 당시 일본 종합격투기의 명맥을 잇고 있던 K-1 히어로즈에게 "제발 사쿠라바 카즈시와 타무라 키요시 선수들 간의 경기를 성사시켜주십시오"라고 부탁했다. 경쟁 단체였던 K-1에게 이렇게 공식적으로 발언하는 것은 상당히 이례적이었다. 그만큼 사쿠라바 카즈시와 타무라 키요시의 대결은 모든 일본 종합격투기 존재가 이 대결의 영향력 아래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대서사의 마침표로 의미하기 때문이었다.

결국 2008년 12월 31일 'K-1 다이너마이트 2008'에서 사쿠라바 카즈시와 타무라 키요시의 대결이 성사됐다. 프로레슬링으로 시작해 실전 종합격투기를 거쳐 상반된 운명을 걷던 두 아이콘이 선수생활의 황혼기에서 다시 만나는 서사는, 일본 격투기의 흥망성쇠를 요약한 듯보였다. 경기 내용은 그리 수준 높지 못 했다. 타무라 키요시의 유효했던 킥이 승부를 기울게 해 타무라 키요시가 판정승을 거두었다. 경기 후 두 선수는 포옹하며 많은 얘기를 나누었다. 그 모습에서 일본 종합격투기를 이해하고 있는 모든 이들에게 감동과 여운을 낳게 했다. 그렇게 일본 격투계는 저물어갔다.

 

 

다음 '세기의 대결'이 있긴 할까

'세기의 대결'이란 형용은 극히 제한적으로 사용돼야 한다. 그냥 유명한 선수들끼리 붙었다고 남용되면 안 된다. 예멜리야넨코 표도르와 미르코 '크로캅' 필리포비치 간의 대결처럼 승자 예측마저 불가하던가, 고미 타카노리와 사쿠라이 '마하' 하야토 간의 대결처럼 이름값에 걸맞게 명승부를 펼치던가, 척 리델과 반더레이 실바 간의 대결처럼 단체의 이름을 걸고 붙던가, 타무라 키요시와 사쿠라바 카즈시의 대결처럼 역사 자체를 상징하던가 해야 한다.

다음 점쳐지는 세기의 대결은 없이 보인다. 어느 단체의 체급 챔피언들이 워낙 막강한 경기력을 연신 보이고 있고 그에 걸맞은 도전자도 딱히 없어 보인다. 수준과 상징과 역사를 모두 충족하는 '세기의 대결'이 그립다. '빅뱅'의 조짐이 보이지 않고 조용한 요즘 격투계가 심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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