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시간 기준 7월 11일 UFC 264가 개최된다. 보통 UFC의 넘버시리즈는 UFC 타이틀전을 메인 경기로 장식한다. 하지만 이번엔 아니다. 타이틀이 걸려있지 않은 일반 선수들의 대결이다. 코너 맥그리거와 더스틴 포이리에의 3차전이 UFC 264의 메인 경기다.

코너 맥그리거와 더스틴 포이리에, 이미 두 번 맞붙은 적이 있다. 2014년 9월 UFC 178에선 코너 맥그리거가 더스틴 포이리에를 1라운드 TKO로 꺾었다. 7년 뒤, 2021년 1월 UFC 257에선 더스틴 포이리에가 코너 맥그리거를 반대로 2라운드 TKO로 꺾었다. 둘은 장군멍군을 주고받았다.

▲ UFC 257에서 2차전을 치룬 코너 맥그리거(왼쪽)과 더스틴 포이리에(오른쪽) (사진: Sherdog)
▲ UFC 257에서 2차전을 치룬 코너 맥그리거(왼쪽)과 더스틴 포이리에(오른쪽) (사진: Sherdog)

약 36년의 프로 격투스포츠 세계에서 같은 선수끼리 세 번의 경기를 가진다는 건, 그리 흔한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세 번이나 서로 맞붙었다는 건, 시대가 그들을 계속해서 원했다는 뜻이고 그만큼 주인공들은 격투스포츠 세계의 중심에 섰다는 것을 의미한다. 

코너 맥그리거와 더스틴 포이리에의 대결에 앞서 종합격투기 역사상 명승부·의미·상징을 두루 낳았던, 종합격투기 역사 교과서가 있었다면 '밑줄 쫙' 그어질 만한 중요했던 '트릴로지'에는 어떤 운명들이 있었을까?

 

 

Pride FC 그 자체
사쿠라바 카즈시 vs 반더레이 실바

과거 세계 종합격투기를 쥐락펴락했던 일본의 Pride FC에는 흥행을 책임진 선수들이 여럿 있었다. 하지만 그 모든 선수들이 단체의 정체성까지 내포한 칭호, '아이콘'은 아니었다. Pride FC 그 자체가 된 '아이콘'이 된 선수가 몇몇 있었는데, 그들이 사쿠라바 카즈시와 반더레이 실바였다.

사쿠라바 카즈시는 그레이시 가문에게 연전연패당했던 선배 다카다 노부히코를 대신해 그레이시 가문 선수들을 사냥하는데 성공하며 '그레이시 헌터'라는 칭호를 얻는가 동시 단숨에 Pride FC를 직접 이끄는 선수가 됐다. 그렇게 사쿠라바 카즈시의 천하가 되는 줄 알았다. 하지만 Pride 13에서 그레이시 가문처럼 주짓떼로는 아니지만 갑자기 등장한 브라질 선수, 반더레이 실바가 사쿠라바 카즈시를 살인적인 타격 끝에 꺾어버렸다.

주짓수가 아닌 무에타이 기반 타격으로 사쿠라바 카즈시를 꺾은 반더레이 실바의 파괴력은 무시무시했다. 반더레이 실바와 사쿠라바 카즈시의 악연이 흥행에 도움이 될 것이라 직감한 Pride FC 주최 측은 그렇게 두 번이나 더 둘을 붙였다. 2차전은 Pride FC의 초대 미들급(약 -93kg) 챔피언을 가리는 경기였다. 사쿠라바 카즈시는 10분이나 되는 1라운드를 버텨냈지만 어깨가 탈구돼 2라운드에 들어서지 못 했고 그렇게 반더레이 실바는 Pride FC 초대 미들급 챔피언이 됐다. 

▲ Pride GP 2003 개막전에서 사쿠라바 카즈시(왼쪽)을 KO시키는 반더레이 실바(오른쪽) (출처: UFC)
▲ Pride GP 2003 개막전에서 사쿠라바 카즈시(왼쪽)을 KO시키는 반더레이 실바(오른쪽) (출처: UFC)

2003년 Pride FC에서는 미들급 그랑프리를 개최했는데, 8강에서 다시 반더레이 실바와 사쿠라바가 맞붙었다. 결과는 더 참혹했다. 반더레이 실바는 훅 연타를 사쿠라바 카즈시 턱에 꽂아 넣어 실신시켰다. 뻗어버린 사쿠라바 카즈시 모습에서 더 이상 반더레이 실바에게 도전할 수 없는 한계를 모두가 느꼈다.  

사쿠라바 카즈시와 반더레이 실바가 세 번이나 격돌하면서 Pride FC는 단체 초창기 흥행가도를 안정적으로 이룩할 수 있었다. '국민 영웅 사쿠라바 카즈시가 언젠가 반더레이 실바를 이기겠지'라는 기대로 팬들은 계속해서 Pride FC에 몰려들었으며, 사쿠라바 카즈시와 반더레이 실바의 트릴로지가 완결나면서 곧바로 다음의 트릴로지가 바통을 이어 받았다.

 

헤비급의 정점
예멜리야넨코 표도르 vs 안토니오 호드리고 노게이라

Pride FC의 미들급이 사쿠라바 카즈시와 반더레이 실바의 대결로 대표됐다면 헤비급(약 +93kg)은 예멜리야넨코 표도르와 안토니오 호드리고 노게이라의 대결로 대표된다.

Pride FC에 처음 등장한 안토니오 호드리고 노게이라는 가히 충격적이었다. '그라운드 앤 파운딩' 전술로 대부분의 선수들이 경기를 풀어 나가려했던 2001년, 주짓수를 주무기로 들고 나와 당시 헤비급 강자들 대부분에게 탭을 받아내는 경기력은 당시 종합격투기 판도를 바꿔놓았다. 그러나 히스 헤링을 꺾고 Pride FC 초대 헤비급 챔피언 된 안토니오 호드리고 노게이라에게 봄날은 너무나도 짧았다.

안토니오 호드리고 노게이라와 함께 링스에서 활동하다가 뒤따라 Pride FC에 입성하는 동시, 곧바로 안토니오 호드리고 노게이라가 꺾었던 세미 슐트와 히스 헤링을 동일하게 꺾으며 Pride FC 헤비급 타이틀 도전자가 된 예멜리야넨코 표도르가 안토니오 호드리고 노게이라 앞에 섰다. 2003년 3월 개최된 Pride 25에서 예멜리야넨코 표도르는 안토니오 호드리고 노게이라가 주짓수 기술 시전하려는 중간 과정 순간에 얼음 같은 파운딩을 여러 차례 적중시키며 안토니오 호드리고 노게이라를 꺾고 새로운 Pride FC 헤비급 챔피언이 됐다. 또 한 번 세계 종합격투기 판도가 바뀌는 순간이었다.

▲ '남제 2004'에서 3차전을 가진 안토니오 호드리고 노게이라(왼쪽)과 예멜리야넨코 표도르(오른쪽) (사진: Scrapdigest)
▲ '남제 2004'에서 3차전을 가진 안토니오 호드리고 노게이라(왼쪽)과 예멜리야넨코 표도르(오른쪽) (사진: Scrapdigest)

2004년 개최된 Pride FC 헤비급 그랑프리에 당연하게 예멜리야넨코 표도르와 안토니오 호드리고 노게이라가 결승에 올랐다. 하늘은 이들의 이야기를 단번에 끝내는 것을 허락지 않았다. 그라운드 상황에서 치명적 버팅으로 예멜리야넨코 표도르 이마에 깊은 부상이 발생해 경기가 중단되고, 그 해 12월 31일 개최된 '남제 2004'에서 Pride FC 헤비급 그랑프리 우승과 Pride FC 헤비급 타이틀을 전부 걸고 3차전이 펼쳐질 것임을 Pride FC 총괄본부장 다카다 노부히코가 직접 공표했다.

4개월이 흐르고 2004년의 마지막 날 '남제 2004'가 개최됐다. 당연히 메인 경기는 예멜리야넨코 표도르와 안토니오 호드리고 노게이라 간의 Pride FC 헤비급 그랑프리 결승전·Pride FC 헤비급 타이틀전이었다. 승리는 예멜리야넨코 표도르의 완승이었다. 경기 내내 안토니오 호드리고 노게이라의 기술에 말려들지 않았고 유효타도 다수 꽂아넣어 승리를 가져왔다.

격투스포츠 전문가들은 대부분 인정한다 종합격투기 역사상 헤비급 판도를 바꾼 4명을 꼽으라면 '그라운드 앤 파운딩'의 최강자였던 마크 콜먼, '주짓수 매지션' 안토니오 호드리고 노게이라, '마지막 황제' 예멜리야넨코 표도르, '완성형 레슬라이커(레슬러+스트라이커)' 케인 벨라스케즈까지. 이 중에 2명이 동시대에 맞붙었다는 것, 2004년의 Pride FC가 세계 헤비급의 정점이었다는 것을 방증하는 것이다.

 

UFC 그 자체
랜디 커투어 vs 척 리델

2007년 Pride FC가 공식적으로 도산되고, 이후 세계 종합격투기의 중심이자 대명사는 곧 UFC였다. 하지만 UFC에도 어두운 시기는 있었다. 라이벌 단체였던 Pride FC가 전성기를 달리던 2000년대 초중반에는 UFC는 지금과 같은 입지는 아니었다. 몇몇의 선수들로 흥행을 겨우 잇던 시절이 있었다.

그 시기에 UFC를 지탱했던 선수들은 현재 UFC의 전설로 추앙받고 있다. 그 주인공들이 랜디 커투어와 척 리델이다. 2000년대 초중반 UFC는 현재와 같이 세밀하게 체급을 나눌 수도 없는 얕은 선수층이었다. 주로 라이트헤비급(약 -90kg)과 헤비급(약 +90kg) 선수들로만 채워졌다. 얕은 선수 층에서 랜디 커투어와 척 리델은 서로 라이벌리를 쌓으며 UFC를 이끌었다.

▲ UFC 57에서 랜디 커투어(왼쪽)을 격침시킨 척 리델(오른쪽) (사진: UFC.com)
▲ UFC 57에서 랜디 커투어(왼쪽)을 격침시킨 척 리델(오른쪽) (사진: UFC.com)

타격가였던 척 리델을 레슬링으로 압도하며 랜디 커투어가 UFC 43에서 먼저 첫 승을 가져갔다. 2년 뒤 펼쳐진 UFC 52에서 척 리델은 랜디 커투어의 근접 레슬링을 경계하면서 원거리 타격을 적중시켜 복수에 성공했다. 불과 10개월 뒤 다시 이들은 맞붙어 동률의 전적을 깨뜨리려 했다. UFC 57에서 마무리된 이들의 트릴로지는 척 리델의 승리로 끝났다. 2차전과 마찬가지로 원거리 타격으로 랜디 커투어를 KO 시킨 척 리델이었다.

Pride FC는 사쿠라바 카즈시와 반더레이 실바가 맞다. UFC는 랜디 커투어와 척 리델이다. 이들이 UFC 초창기를 이끌었기 때문에 현재의 UFC가 있는 것이다. UFC 그 자체로 불릴만한 랜디 커투어와 척 리델이다.

 

Pride FC와 DREAM을 잇는 트릴로지
아오키 신야 vs 요아킴 한센

Pride FC가 가지는 일본 격투기에서의 영향력은 대단하다. 일본에서 탄생하는 메이저 종합격투기 단체 대부분이 'Pride FC의 후신'을 자처하기 때문이다. 그 첫 단체가 DREAM이었다. Pride FC 도산 1년 후, DREAM이 출범하여 Pride FC의 혼을 이으려했다. 그렇지만 그냥 잇는다고 이어지는가? Pride FC에서 발생한 사건을 그대로 이어 받아야지. 그 사건이 아오키 신야와 요아킴 한센의 트릴로지다.

아오키 신야가 Pride FC에 등장했을 때의 충격은 2001년 안토니오 호드리고 노게이라가 첫 등장했을 때와 흡사했다. 데뷔하자마자 두 경기 모두를 트라이앵글 초크로 승리를 거둬냈다. 그리고 '남제 2006'에서 '북유럽의 암살자' 요아킴 한센과 처음 만나 당시 해설자들도 바로 기술을 명명하지 못 했던 새로운 기술 '고고 플라타'로 탭을 받아내 세계 경량급 종합격투기 새로운 바람을 일게 했다. 

▲ DREAM 11에서 라이트급 타이틀을 걸고 3차전을 치룬 요아킴 한센(아래)와 아오키 신야(위) (사진: Sherdog)
▲ DREAM 11에서 라이트급 타이틀을 걸고 3차전을 치룬 요아킴 한센(아래)와 아오키 신야(위) (사진: Sherdog)

Pride FC가 도산하고 아오키 신야와 요아킴 한센은 새로이 출범한 DREAM으로 둥지를 옮겼다. DREAM이 출범하자마자 개최한 라이트급 그랑프리에 두 선수 모두 출전했다. 아오키 신야는 결승까지 올라갔다. 요아킴 한센은 8강에서 탈락했다. 하지만 아오키 신야와 결승에서 맞붙기로 한 에디 알바레즈가 부상으로 이탈하고 빈자리를 리저브 자격을 얻어낸 요아킴 한센 대체했다. DREAM 라이트급 그랑프리 결승에서 이들의 2차전이 펼쳐진 것이다. 요아킴 한센의 감각적 파운딩 공격에 아오키 신야는 TKO패 당했다. 그랑프리 8강 탈락자가 대체 선수 자격으로 결승에 출전해 과거 굴욕적 패배를 안겨준 상대에게 복수를 해내면서 챔피언 벨트까지 얻어내다니. 이 날은 요아킴 한센 인생에 최고의 날이었을 것이다.

DREAM은 일본 단체였다. 요아킴 한센이 일본에서 인기 있는 선수였어도 아오키 신야가 챔피언 자리에 오르는 그림을 더 원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요아킴 한센의 DREAM 라이트급 타이틀전 1차 방어 상대를 바로 아오키 신야로 내정했다. 한 수 높은 그라운드 실력으로 아오키 신야는 암바를 성공시켜 DREAM 라이트급 타이틀을 뺏어오며 요아킴 한센과의 트릴로지 최종 승자를 자신으로 장식했다.

일본 메이저 격투 단체의 계보는 Pride FC, DREAM과 센고쿠, 라이진 FF로 이어진다. Pride FC의 후신을 DREAM과 센고쿠가 나눠가졌지만 DREAM은 주장할 수 있는 것이다. 아오키 신야와 요아킴 한센의 트릴로지로 Pride FC의 진정한 후신은 DREAM이었다고.

 

두 개의 태양은 있을 수 없었다
케인 벨라스케즈 vs 주니어 도스 산토스

2007년 이후 본격적으로 UFC가 세계 종합격투기 판도를 통일하고 나서 UFC의 선수 층은 상당히 두터워졌다. 그에 따라 체급별 선수 기량도 역시 눈에 띄게 좋아졌다. 케이지 형태의 옥타곤이라고 하여 단순 레슬러들이 주름잡는 것이 아닌, 레슬러여도 타격이 가미된 혹은 타격가라도 레슬링 방어가 탁월한 완성형 선수들이 점차 등장하기 시작했다.

UFC의 체급이 세분화되고 여러 체급이 신설돼도 가장 인기 있는 체급은 헤비급이었다. 언제든지 무서운 타격이 터져 KO에 대한 기대를 할 수 있게 되고 여러 스타들이 즐비했기 때문에 UFC 헤비급의 판도를 누가 가져가냐는 것이 세계 종합격투기에서는 상시 화두였다.

UFC 헤비급에서 가장 강렬한 불꽃을 내뿜었던 라이벌리는 케인 벨라스케즈와 주니어 도스 산토스였다. 'UFC on FOX 1'에서 맞붙은 케인 벨라스케즈와 주니어 도스 산토스의 1차전은 아주 빨리 끝났다. 1라운드 약 1분 만에 주니어 도스 산토스의 라이트 스윙이 케인 벨라스케즈 후두부 근처에 적중해 승리를 거두었다. 

▲ UFC 166에서 3차전을 끝낸 주니어 도스 산토스(왼쪽)와 케인 벨라스케즈(오른쪽) (사진: 블리처리포트)
▲ UFC 166에서 3차전을 끝낸 주니어 도스 산토스(왼쪽)와 케인 벨라스케즈(오른쪽) (사진: 블리처리포트)

약 1년 뒤 UFC 155에서 이들의 2차전이 펼쳐졌다. 허망하게 패한 케인 벨라스케즈는 더 업그레이드돼서 돌아와 5라운드 내내 레슬링으로 주니어 도스 산토스를 압도했다. 그야말로 완봉이었다. 이젠 상황의 바뀌었고, 주니어 도스 산토스는 마크 헌트로부터 승리를 거두어 다시 도전자 자격을 얻어냈다. 그러나 3차전은 주니어 도스 산토스에게 더 끔찍했다. 자신은 타격가임에도 레슬러 케인 벨라스케즈의 펀치를 턱에 허용해 다운을 당하기도 했고, 밀리는 경기력에 5라운드 중반부 전의를 상실해 TKO 패했다.

주니어 도스 산토스는 1차전 승리로 UFC 헤비급 16대 챔피언이 됐다. 케인 벨라스케즈는 2차전 승리로 17대 챔피언이 됐다. 즉, 이들의 트릴로지가 진행되는 동안 UFC 헤비급에는 두 개의 태양에 공존했던 것이다. 결국 케인 벨라스케즈라는 태양만이 살아남았지만, 이들이 주먹을 섞으며 UFC 헤비급의 수준은 크게 향상됐다.

 

15년간 펼쳐진 트릴로지
마우리시오 '쇼군' 후아 vs 안토니오 호제리오 노게이라

세 번이나 만나야 붙여지는 단어 '트릴로지', 그 세 번의 만남이 끝나기까지 무려 15년이 걸렸다면 그 주인공들은 종합격투기 세계에서 상당한 롱런을 이루었다는 말이 되고 그들은 곧 역사요, 그들의 대결 역시 역사가 된다. 15년에 걸친 트릴로지를 쓴 주인공들은 마우리시오 '쇼군' 후아(이하 쇼군)와 안토니오 호제리오 노게이라다.

이들의 첫 만남은 2005년 Pride FC 미들급 그랑프리로 거슬러 올라간다. 쇼군은 16강에서 퀸튼 '람페이지' 잭슨을 만나 1라운드 TKO로 꺾고 8강에 진출했다. 안토니오 호제리오 노게이라는 댄 헨더슨을 암바로 꺾고 8강에 진출했다. 우승후보로 손꼽히던 이 둘을 Pride FC는 8강에서 맞붙여버리는 초강수를 뒀다. 

결과는 쇼군의 승리였다. 서로 한 번의 다운을 뺏어내기도 했고 총 경기 시간 20분 내내 쉴 세 없는 공방을 이어 나가 종합격투기 역사상 대표적인 명경기로 서로의 1차전을 장식했다. 그렇게 Pride FC가 도산하고 쇼군과 안토니오 호제리오 노게이라 역시 UFC로 활동 무대를 옮겼다. 

▲ 'UFC on ESPN 14'에서 3차전을 치룬 마우리시오 '쇼군' 후아(왼쪽)와 안토니오 호제리오 노게이라(오른쪽) (사진: Sherdog)
▲ 'UFC on ESPN 14'에서 3차전을 치룬 마우리시오 '쇼군' 후아(왼쪽)와 안토니오 호제리오 노게이라(오른쪽) (사진: Sherdog)

1차전이 이후 10년이 지난 2015년이 돼서야 UFC 190에서 이들이 다시 만났다. 전성기가 한참 지난 쇼군과 안토니오 호제리오 노게이라였지만 서로를 제압하려는 끝없는 공방으로 다시 한 번 명승부를 일궈냈다. 2차전 역시 쇼군의 승리였다. 그리고 5년 뒤, 'UFC on ESPN 14'에서 이들은 마지막 자웅을 겨루었다. 3차전도 쇼군의 승리였다. 3차전도 1·2차전과 다름없이 서로의 명성을 걸만했고 서로의 기술력을 총동원한 명승부였다.  

무려 15년이다. 15년에 걸쳐 트릴로지를 이었다는 것 자체에 쇼군과 안토니오 호제리오 노게이라에게 박수를 보낼만하다. 승패가 무슨 상관이랴. 시대를 관통하며 각자의 가치와 경쟁력 등을 아낌없이 서로의 트릴로지에서 선보였는데. 쇼군과 안토니오 호제리오 노게이라, 전설로 대우받기에 부족함이 없다.

 

가장 최근 뜨거웠던 트릴로지
스티페 미오치치 vs 다니엘 코미어

두터워진 선수층, 고도화되는 선수들의 실력에 최근 프로 격투계에는 세 번이나 붙는 트릴로지가 쉽게 성사되기 어렵다. 챔피언이 존재해도 챔피언을 노리고 챔피언에 버금가는 실력을 갈고 닦는 도전자들이 많아지고, 선수들이 갈수록 발전하기 때문에 특정 선수 간의 대결만 고집할 이유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2018·2019·2020년를 뜨겁게 장식한 UFC 헤비급의 트릴로지가 있었다. 스티페 미오치치와 다니엘 코미어가 쓴 서사는 우리가 기억하는 가장 최근의 트릴로지다.

▲ (사진: Sherdog)
▲ UFC 252에서 3차전을 치룬 스티페 미오치치(왼쪽)와 다니엘 코미어(오른쪽) (사진: Sherdog)

문제아 존 존스를 제외하고 UFC 라이트헤비급을 평정한 다니엘 코미어는 헤비급으로의 월장을 2018년 선언했다. 선언하자마자 UFC 헤비급 챔피언 스티페 미오치치에게 1라운드 KO승을 거둬 곧바로 UFC 헤비급 챔피언이 됐다. 데릭 루이스마저 꺾고 1차 방어까지 성공한 다니엘 코미어에게 UFC는 도전자가 스티페 미오치치 밖에 없다고 판단, 다니엘 코미어와 스티페 미오치치의 2차전을 확정 지었다.

2차전은 스티페 미오치치의 완벽한 복수였다. 지속적 바디 공격에 따라 다니엘 코미어의 가드가 허술해졌고 이어서 유효타를 성공시켜 4라운드 TKO로 스티페 미오치치는 다시 UFC 헤비급 챔피언 벨트를 가져왔다.

UFC 252에서 스티페 미오치치와 다니얼 코미어의 트릴로지 완결편이 확정됐다. 역시 스티페 미오치치가 우위를 가져가는 경기 양상이었다. 다니엘 코미어의 레슬링을 효과적으로 방어하고 타격 역시 더 많이 적중시켰다. 결국 이들의 트릴로지는 스티페 미오치치의 승리로 마무리 지어졌다. 

 

 

재경기를 주저하지 말라

Pride FC와 UFC와 함께 세계 격투계를 이끌던 단체가 있었다. 입식 타격 전문 단체였던 K-1. K-1은 종합격투기 전문 단체는 아니었지만 세계적 명성을 떨치는 데 성공한 분명한 메이저 단체였다. K-1이 메이저 단체로 거듭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선수들의 재대결에 고민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K-1을 이끌었던 피터 아츠, 앤디 훅, 마이크 베르나르도, 제롬 르 밴너, 어네스트 후스트 모두 서로 여러 번의 대결을 치르며 서로 발전해갔고 눈길을 끌만한 서사로도 완성돼 곧, 이는 격투팬들의 단단한 지지로 승화됐다. 

반드시 새로운 대결만으로 흥행의 답을 찾을 것이 아니다. 실력으로 서로를 제압하려는 스포츠 정신에서도 이야기가 만들어질 수 있으며, 그 지점에서 자연스레 흥행은 뒤따른다. UFC를 비롯한 세계 여러 격투 단체들은 반드시 인지해야 한다. 새로움은 공급 없이는 반드시 고갈된다. 발전을 동반하는 재대결 성사에 주저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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