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도적인 재정 능력을 앞세운 세계 제1의 프로레슬링 단체 WWE는 평균적으로 한 달에 1개의 PPV를 개최하고 있다. 12개의 PPV 중에서 1월에 개최되는 '로얄럼블', 3월 말~4월 초에 개최되는 '레슬매니아', 8월에 개최되는 '섬머슬램', 11월에 개최되는 '서바이버 시리즈'까지 WWE는 4개 PPV로 대우하여 흥행에 집중한다.(가끔 7월에 개최되는 '머니 인 더 뱅크'까지 5대 PPV로 소개하는 경우도 있다.)

올해 섬머슬램은 한국시간 기준 2021년 8월 22일 오전 9시에 개최된다. 아주 높은 확률로 WWE는 PPV를 현지시간 기준 일요일 저녁에 개최해왔기 때문에 한국시간으론 월요일 오전인지라 맘 편히 즐기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이번은 한국시간으로도 일요일 오전이기에 주말에 즐길 수 있게 됐다. 

▲ 로만 레인즈와 존 시나가 격돌하는 'WWE 섬머슬램 2021' (사진: WWE.com)
▲ 로만 레인즈와 존 시나가 격돌하는 'WWE 섬머슬램 2021' (사진: WWE.com)

특히, 올해의 섬머슬램은 WWE가 레슬매니아에 버금가도록 흥행에 집중할 것이라 일찌감치 공표했었다. 이유는, 올해 4월 10·11일 개최된 레슬매니아 37까지 코로나19의 영향으로 만족스러운 흥행을 일궈내지 못 했기 때문에, 레슬매니아 다음 4대 PPV에서 흥행을 만회하기 위해 'WWE 섬머슬램 2021' 흥행에 크게 공을 들이는 모습을 보였다. 그 결과 올해 섬머슬램에는 존 시나와 골드버그가 동시 출전한다!

레슬매니아에 흥행을 이루지 못 했다고 해서 그 다음 기회를 섬머슬램으로 잡은 이유는 그만큼 섬머슬램이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WWE의 대표 PPV기 때문이다. 레슬매니아만큼이나 섬머슬램 역시 WWE 역사의 변곡점에 여러 번 위치했었다. WWE의 4대 PPV로서 당당히 대우받게 해 주었던 섬머슬램의 지난 날 여덟 역사를 다시 되짚어보자.

 

1988 : 첫 섬머슬램을 장식한 메가 파워스

1985년 처음 개최된 레슬매니아, 1987년 처음 개최된 서바이버 시리즈, 1988년 처음 개최된 로얄럼블과 섬머슬램까지 이 4개의 PPV는 공통적으로 1980년대 역사를 처음 시작한 긴 역사를 자랑한다. 전통과 역사를 자랑하기에 괜히 WWE에서 4대 PPV로 대우하는 것이 아니다. 

▲ 첫 섬머슬램에서 승리를 거둔 '마초맨' 랜디 새비지와 헐크 호건의 '메가 파워스' (사진: WWE.com)
▲ 첫 섬머슬램에서 승리를 거둔 '마초맨' 랜디 새비지와 헐크 호건의 '메가 파워스' (사진: WWE.com)

섬머슬램이 처음 개최된 1988년, 이 당시에 프로레슬링계를 상징하는 아이콘들이 여럿 있었다. 그 아이콘들 중에서 무려 4명이 '1988 WWE 섬머슬램' 마지막 경기에서 맞붙었다. 랜디 새비지, 헐크 호건, 테드 디바이시, 앙드레 더 자이언트. 1980년대 후반의 프로레슬링은 선역과 악역이 뚜렷한 다소 1차원적인 각본으로 진행됐다. 선역의 정점에 서있던 '마초맨' 랜디 새비지와 헐크 호건이 어마무시한 인기를 앞세워 프로레슬링 1세대 악역의 아이콘 테드 디바이시와 앙드레 더 자이언트를 꺾고 '메가 파워스'의 위세를 강력하게 떨쳤다. 섬머슬램의 첫 역사는 '마초맨' 랜디 새비지와 헐크 호건의 '메가 파워스'가 장식했다.

 

1992 : 영국에서 개최된 섬머슬램

1980년대 헐크 호건, '마초맨' 랜디 새비지, 얼티밋 워리어 등의 아이콘을 앞세워 흥행을 연신 성공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아이콘들로 대표되는 프로레슬링 1세대의 상업적 가치, 선수 생명 등이 서서히 하향세를 그리고 있었다. 그리하여 WWE는 두 가지 방편을 모색하는데, 새로운 스타 발굴과 해외로의 진출이었다. 그 두 가지를 WWE는 1992년 섬머슬램에서 동시에 쟁취했다.

▲ 영국 런던에서 개최된 'WWE 섬머슬램 1992' 메인 경기를 장식한 브렛 하트(왼쪽)과 브리티쉬 불독(오른쪽) (사진: WWE.com)
▲ 영국 런던에서 개최된 'WWE 섬머슬램 1992' 메인 경기를 장식한 브렛 하트(왼쪽)과 브리티쉬 불독(오른쪽) (사진: WWE.com)

1992년 8월 29일 개최된 섬머슬램의 장소는 영국 문화의 성지, 런던 웸블리 스타디움에서 개최됐다. 현장 관객 수 역시 21세기의 지금에서도 쉽게 도달하기 힘든 80,355명으로 공식 집계됐다. 단순히 영국이란 해외에서 첫 개최했다고 이 흥행을 거둔 것이 아니다. 영국 국기 '유니언 잭'을 자신의 상징처럼 여기던 영국의 프로레슬러 브리티쉬 불독과 1세대 프로레슬링 아이콘들의 뒤를 이어 2세대 프로레슬링의 장을 열던 브렛 하트가 맞붙어 다섯 번째 섬머슬램을 완벽하게 장식했다. 비로소 프로레슬링은 세계적 콘텐츠, WWE는 세계적 프로레슬링 단체가 된 것이다.

 

1994 : 언더테이커와 언더테이커

1990년대에 들어서자마자 WWE는 향후 30년가량 WWE의 흥행 선두에 서는 역사적 아이콘을 데뷔시키게 되는데, 그가 바로 언더테이커다. 'WWE 서바이버 시리즈 1990'에 깜짝 데뷔한 언더테이커의 모습은 '기괴' 그 자체였으며, 장의사가 음산한 기운을 내뿜으며 당대 프로레슬링 아이콘들을 제압하는 모습은 프로레슬링 역사에 있어 큰 획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언더테이커는 데뷔서부터 프로레슬링계에 충격을 몰고 왔던 것이다.

▲ 진짜 언더테이커(왼쪽)과 가짜 언더테이커(오른쪽)가 맞붙은 'WWE 섬머슬램 1994' (사진: WWE.com)
▲ 진짜 언더테이커(왼쪽)과 가짜 언더테이커(오른쪽)가 맞붙은 'WWE 섬머슬램 1994' (사진: WWE.com)

1990년대 초, 언더테이커의 사기적 존재감은 WWE를 지배하게 충분했었다. WWE는 세계 제1의 스포츠 엔터테인먼트 단체답게 기발한 대립을 연출했다. 'WWE 섬머슬램 1994'의 메인 경기를 언더테이커와 언더테이커의 대결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즉 진짜와 가짜, 링 위에 두 명의 언더테이커가 서있던 것이다. 한 명만 서있는 것으로도 기괴스러운데 두 명이 서있는 장관이라니. 상상을 현실화시키는 WWE의 각본 전개 연출에 프로레슬링 팬들은 감탄을 감추지 못 했다. 아마 가장 충격적인 섬머슬램 역사적 순간이 아닐까 싶다.

 

2001 : WWE vs WCW & ECW

21세기에 들어 북미 프로레슬링계는 큰 변혁을 겪게 된다. 1990년대 말부터 2000년대 들어서기까지 WWE, WCW, ECW 세 단체는 각기 다른 매력으로 북미 프로레슬링계에서 살아남고 있었다. 결국 재정난을 이기지 못 한 WCW와 ECW는 WWE에 인수됐다. WWE는 그야말로 자본주의가 낳은 괴물이던가? 이 인수 사실마저도 각본화 해, 소위 '인베이전 각본'을 2001년 7월부터 11월까지 대대적으로 전개했다.

▲ WWE 선두에 섰던 커트 앵글이 WCW&ECW 연합군의 수장 '스톤콜드' 스티브 오스틴에게 '앵클 락'을 시도하고 있다 (사진: WWE.com)
▲ WWE 선두에 섰던 커트 앵글이 WCW&ECW 연합군의 수장 '스톤콜드' 스티브 오스틴에게 '앵클 락'을 시도하고 있다 (사진: WWE.com)
▲ WWE의 아이콘 '더 락' 드웨인 존슨이 당시 WCW 챔피언이었던 부커 T를 공격하고 있다 (사진: WWE.com)
▲ WWE의 아이콘 '더 락' 드웨인 존슨이 당시 WCW 챔피언이었던 부커 T를 공격하고 있다 (사진: WWE.com)

2001년의 섬머슬램 역시 '인베이전 각본' 과정 중 하나의 PPV였다. 두 개의 타이틀전이 '인베이전 각본'을 증폭시켰다. WWE 챔피언으로써 WCW와 ECW의 연합군, 얼라이언스 수장이 된 '스톤콜드' 스티브 오스틴에 도전했던 커트 앵글, WCW 챔피언으로써 WWE 침공 대장 부커 T에 도전했던 '더 락' 드웨인 존슨, 이 두 개의 대결은 단순 선수와 선수의 대결이 아닌 단체와 단체의 대립이라는 수준으로 '인베이전 각본'을 키우는 데 성공했다. 특히, 악역 챔피언 '스톤콜드' 스티브 오스틴에 맞서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탭도 치지 않은 커트 앵글에서 많은 프로레슬링 팬들이 감격했었다.

 

2002 : 최연소 챔피언에 등극한 브록 레스너

2001년을 기점으로 WWE의 최전성기를 이끌었던 성인지향 '애티튜드 시대'는 막을 내리고 있었다. '애티튜드 시대'를 선두에서 이끌었던 '스톤콜드' 스티브 오스틴은 고질적인 목 부상으로 은퇴를 앞두고 있었다. 역시 '애티튜드 시대'를 같이 이끌던 '더 락' 드웨인 존슨은 서서히 영화배우로 전업하고 있었다. 즉 새로이 WWE를 이끌 아이콘이 필요했다. 그 아이콘이 2002년 섬머슬램에서 어마무시한 괴력을 선보이며 등장했다.

▲ 데뷔 5개월만에 WWE 챔피언쉽에 도전하는 브록 레스너(왼쪽)과 당시 챔피언 '더 락' 드웨인 존슨(오른쪽) (사진: WWE.com)
▲ 데뷔 5개월만에 WWE 챔피언쉽에 도전하는 브록 레스너(왼쪽)과 당시 챔피언 '더 락' 드웨인 존슨(오른쪽) (사진: WWE.com)

브록 레스너는 WWE에 2002년 3월 18일에 데뷔했다. 그리고 그 해 '킹 오브 더 링'에 우승하며 곧 바로 섬머슬램에서 챔피언 '더 락' 드웨인 존슨에게 도전했다. 락바텀과 F-5의 공방이 이어졌지만 마지막으로 시전된 기술은 브록 레스너의 F-5였다. 브록 레스너는 '더 락' 드웨인 존슨을 꺾고 만 25세의 나이로 최연소 WWE 챔피언이 되는 데 성공했다. '더 락' 드웨인 존슨에게 핀폴을 얻어내는 브록 레스너의 모습에서 WWE 아이콘 간의 이관식처럼 보였다. 아직까지도 막대한 영향력을 끼치는 브록 레스너의 존재, 그 시작이 바로 2002년의 섬머슬램이었다.

 

2005 : 전설과 아이콘

세대를 거스르는 만남은 언제나 가슴을 설레게 한다. 2005년 WWE에서 강렬한 대립을 선보였던 헐크 호건과 숀 마이클스는 프로레슬링 역사에 있어 세대를 대표하는 전설과 아이콘이다. 헐크 호건은 1세대 프로레슬러로써 프로레슬링 그 자체가 됐고, 숀 마이클스는 1세대 프로레슬러들과는 달리 현란한 경기력을 선보이며 프로레슬링도 스포츠로써 대우받을 수 있게 인식 개선에 크게 기여했다. 그렇게 헐크 호건과 숀 마이클스는 2005년 7월 4일 RAW에서 태그팀을 맺어 무하마드 핫산과 다바리를 꺾었다. 승리 후 숀 마이클스는 헐크 호건에게 스윗 친 뮤직을 날리며 선전포고했다.

▲ 'WWE 섬머슬램 2005'에서 드림매치를 성사시킨 헐크 호건(왼쪽)과 숀 마이클스(오른쪽) (사진: WWE.com)
▲ 'WWE 섬머슬램 2005'에서 드림매치를 성사시킨 헐크 호건(왼쪽)과 숀 마이클스(오른쪽) (사진: WWE.com)

2005년 섬머슬램을 앞두고 숀 마이클스가 헐크 호건과 대립하며 선보인 도발의 향연은 왜 숀 마이클스가 WWE 역사상 최고의 엔터테이너인지 입증했다. 헐크 호건처럼 분장해 헐크 호건을 노인이라 능욕하고, 캐나다 몬트리올에 가서 헐크 호건뿐만이 아닌 브렛 하트까지 연달아 능욕해 캐나다 프로레슬링 팬들을 비롯한 세계 프로레슬링 팬들의 공분 아닌 공분을 샀다. 결국 'WWE 섬머슬램 2005'에서 펼쳐진 헐크 호건과의 드림매치에서 패했지만, 모두가 기억할 것이다. 숀 마이클스가 아니었다면 ‘WWE 섬머슬램 2005’의 기대감은 어느 누구도 끌어올릴 수 없었다는 것을.

 

2009 : 존 시나의 안티테제들

WWE는 '애티튜드 시대'를 지나 존 시나가 홀로 흥행 선두에 선 'PG 시대'를 맞이하게 됐다. 성인지향 자극적인 연출을 지양하고 존 시나로 대표되는 선이 악을 확실하게 제압하는 과정을 주로 다뤄 WWE의 시청층은 'PG-13' 등급에 맞게 아래로 더 넓어졌다. 그로 인해 '애티튜드 시대'를 그리워하던 프로레슬링 팬들은 존 시나의 안티로 본격적으로 돌아섰고, 존 시나를 대체할 수 있는 안티테제들을 찾기 시작했다. 그 후보군이 제프 하디와 CM 펑크였다.

▲ 2009년 존 시나의 상품가치에 버금갔던 제프 하디(왼쪽)과 CM 펑크(오른쪽) (사진: WWE.com)
▲ 2009년 존 시나의 상품가치에 버금갔던 제프 하디(왼쪽)과 CM 펑크(오른쪽) (사진: WWE.com)

제프 하디는 WWE '애티튜드 시대' 태그팀 부문 전성기를 이끌었던 하디 보이즈의 멤버였다. CM 펑크는 인디 단체에서 경력을 쌓다 WWE에 입성하여 안티-히어로의 기질을 뽐내고 있었다. '애티튜드 시대'의 활약과 안티-히어로 기질, 제프 하디와 CM 펑크의 이 요소는 존 시나의 안티테제가 되기 충분했다. 이들은 2009년 중반 대립을 이어가는데, 무엇보다 눈이 즐거웠다. 비교적 경량급으로 분류되는 제프 하디와 CM 펑크의 신체를 기반으로 하드코어, 하이-플라이 스타일 프로레슬링은 지난 날을 그리워하던 프로레슬링 팬들의 감성을 자극하기 충분했다. 제프 하디와 CM 펑크의 대립은 2009년 섬머슬램에서 TLC 매치로 마침표를 찍게 된다. 제프 하디의 최전성기, CM 펑크의 수직 성장 모두 확인할 수 있는 시기의 정점이 2009년 섬머슬램이다. 만약 존 시나의 연전연승에 지쳤다면 이 때의 제프 하디와 CM 펑크를 보면 된다.

 

2015 : 우리가 기억하는 마지막 라이벌

앞서 말했듯이, 언더테이커와 브록 레스너의 데뷔는 강렬했다. 이들의 데뷔 자체가 프로레슬링 역사책에 반드시 기록돼야 할 만큼 그 자체로 중요한 역사다. 언더테이커는 데뷔 당시 가졌던 장의사 기믹을 거쳐, 사이비 교주, 폭주족, 은퇴 직전 초월적인 존재의 모습으로 활동했다. 브록 레스너는 중간 다른 종목 도전을 위하여 이탈했지만 복귀 후, 자타공인 WWE의 끝판왕으로써 존재감은 여전히 떨치고 있다. 그런 이들이 우리가 기억하는 마지막 라이벌이었다는 것이다.

▲ 'WWE 섬머슬램 2015'에서 서로를 보고 포효하고 있는 언더테이커와 브록 레스너 (사진: WWE.com)

최근 WWE가 시도했던 라이벌리가 여럿 있었다. 브론 스트로우맨과 로만 레인즈, AJ 스타일스와 나카무라 신스케, 케빈 오웬스와 새미 제인. 그러나 언더테이커와 브록 레스너의 존재감에 비할 수 없었다. 2014년 개최된 레슬매니아 30에서 언더테이커는 브록 레스너에게 레슬매니아 첫 패를 당한다. 그 이후 'WWE 배틀그라운드 2015' 마지막 종소리와 함께 브록 레스너 앞에 등장하여 재대결을 예고했다. 그리고 펼쳐진 'WWE 섬머슬램 2015'에서 둘의 대결은 그야말로 미친 자들의 격돌이었다. 공방을 거듭하다 결코 제압되지 않는 서로를 보며 미친 듯이 포효하는 장면은 언더테이커와 브록 레스너의 징글징글한 연을 상징하기에 충분했다. 과연 이 연출을 다른 PPV에서 나오길 WWE가 허락했을까? 섬머슬램이기에 언더테이커와 브록 레스너의 대결을 성사시켰고 섬머슬램이었기에 이들의 포효를 확인할 수 있었다.

 

 

여름에 어울리는 프로레슬링

여름은 덥다. 더우면서도 습하다. 그렇기 때문에 갈증이 더 나고 예민해진다. 불쾌지수가 높아지는 여름이기에 내 입에 들어가는 어떤 것이던 자극적이고 시원한 것이 더욱 생각나며, 음악도 시원한 음악, 영화도 색이 확실한 영화가 더 당기기 마련이다. 

이런 점에서 봤을 때 프로레슬링은 여름에 즐기기 적합한 콘텐츠다. 거구의 선수들이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여 상대방을 제압한다. 아니면 작은 체구의 선수들이 온몸을 내던지며 화려한 기술들을 선보인다. 여름에 접하면 더 답답할 것 같은 '고구마'는 프로레슬링에서는 거의 없다.

이 점을 포착해 WWE는 가장 더운 8월에 '섬머슬램'을 힘을 주어 개최하고 큰 흥행을 노린다. 각본 '전개'의 속성을 보이는 기타 PPV와는 달리 '섬머슬램'은 각본 '결말'을 주로 선보여 확실한 연출로 프로레슬링 팬들에게 시원함을 선사한다. 아직까지도 습하고 더운 이번 여름, 섬머슬램을 즐기며 여름을 잠시 잊어보는 것도 슬기로운 방법이 될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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