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축구 여름 이적 시장 폐장을 앞두고 대형 이적이 발생했다. 리오넬 메시의 라이벌이자 2010년대 세계 축구를 양분했던 크리스티아누 호날두가 유벤투스 FC를 떠나 자신을 월드 클래스 축구선수의 반열로 오르게 해 주었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로 12년 만에 돌아온 것이다. 

단순히 크리스티아누 호날두가 소속팀을 옮겨서 화제가 되는 것이 아니다. 돌아온 곳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기 때문이다. 물론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의 첫 프로 클럽은 스포르팅 CP였지만 그 당시에는 유망주 시절이었고, 본격적으로 날개를 단 곳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였다. 축구팬 뿐만이 아닌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의 이름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의 빨간 옷을 입은 크리스티아누 호날두를 강렬하게 기억하기에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복귀는 큰 사건이 맞다.

▲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의 복귀를 알리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웹페이지 (사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공식 홈페이지)
▲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의 복귀를 알리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웹페이지 (사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공식 홈페이지)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처럼 과거의 강렬했던 활약과 존재감이 잔존한 채, 해당 선수가 다시 친정팀으로 복귀했을 때의 감동과 전율은 이루 말 할 수 없다. 이 과정을 경험해 본 세계의 종목 막론 스포츠 스타들이 여럿 있다. 

12년만에 크리스티아누 호날두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의 빨간 유니폼을 입고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홈구장 올드 트래포드를 다시 누비게 된 것과 같이, 친정팀으로 복귀해 여전한 팬들의 지지를 한 몸에 받은 선수들엔 누가 있었을까? 그 팀에서 그 선수는 대체 어떤 존재였을까?

 

 

다시 울려 퍼진 '위송빠레'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 대회에서 대한민국이 세계를 놀라게 한 4강 신화를 이룩하며, 당시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주축 선수들은 유럽 축구의 부름을 다수 받았다. 그 중심에 박지성이 있었고 2003년 PSV 에인트호번을 시작으로 ‘해버지’의 길을 걷게 된다.

'2004-2005 UEFA 챔피언스리그'에 PSV 에인트호번을 4강으로 올려놓은 박지성은 네덜란드 축구팬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으며 '빅 클럽'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이하 맨유)로 이적하게 된다. 맨유로 가서도 박지성의 성장과 활약이 계속됐다. 2007-2008 시즌에는 특히 잉글랜드 프리미어 리그와 UEFA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동시에 달성했던 맨유의 주축 멤버였다. 2010년대 후반부터를 대한민국 축구의 아이콘이 손흥민이었다면 2000년대 중반부터 2010년대 중반까지 손흥민보다 앞선 선배 아이콘은 ‘해버지’ 박지성이었다.

▲ (사진: PSV 에인트호번 공식 홈페이지)
▲ (사진: PSV 에인트호번 공식 홈페이지)

그렇게 상승가도를 달리던 박지성은 2012년을 기점으로 하향곡선을 그렸다. 2012년 시즌 말미 맨유 주전 경쟁에서 밀리고 이적을 결심하여 2012년 여름 이적 시장에서 퀸즈 파크 레인저스로 이적한다. 하지만 새로운 팀에서도 박지성의 하향곡선은 달라지지 않았으며 새로운 환기가 필요했던 박지성은 다시 팀을 옮기는데, 2013년 7월 자신의 유럽 축구 인생을 시작했던 PSV 에인트호번으로 임대 이적한다.

PSV 에인트호번의 홈구장 필립스 스타디온에는 8년 만에 다시 박지성만을 위해 만들어진 응원가 '위송빠레'가 울려 퍼졌다. 세월이 지나도 네덜란드는 박지성의 추억을 간직했던 것이다. 박지성의 PSV 에인트호번 2기 활약이 빼어났다고는 할 수 없지만, 절대적인 지지를 보내주는 팬들과 함께 선수생활을 마감했다는 점은 박지성에게 분명히 영광스러운 은퇴였을 것이다.

 

난 집에 돌아간다

르브론 제임스의 프로 농구 인생은 시작부터 화려했다. 2003년 NBA 신인 드래프트는 가히 전설로 남아 있는데 크리스 보시, 카멜로 앤서니, 드웨인 웨이드 그리고 르브론 제임스가 같은 해 드래프트에서 동시에 지명받아 동시에 NBA 데뷔를 이룬다. 이 중에서도 르브론 제임스가 가장 압도적인 유망주로 평가받고 주목을 많이 받았으며 그렇게 르브론 제임스의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 1기가 시작된다.

2000년대 초반 당시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는 그리 강팀이 아니었다. 지드루나스 일가우스카스라는 수준급 센터가 있었지만 혼자선 역부족이었다. 이러한 팀 상황에서 르브론 제임스가 고군분투하여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의 스타가 되는 데는 성공했을지 몰라도 팀에게 우승 트로피를 안겨다 주지는 못 했다. 

▲ (사진: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 공식 홈페이지)
▲ (사진: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 공식 홈페이지)

클리블랜드의 소년 가장에게도 FA라는 것이 다가왔다. 희대의 생방송 'The Decision'에서 공개적으로 마이애미 히트로 이적할 것이라 처음 밝히고 클리블랜드라는 집을 떠났다. 이후 르브론 제임스는 마이애미 히트에서 NBA 데뷔 동기였던 크리스 보시, 드웨인 웨이드와 함께 '빅3'를 구성하며 2010년대 초중반 마이애미 히트를 NBA 최강팀으로 만들었다. 이 시기 우승 트로피와 함께 르브론 제임스의 거만한 행동거지에 따라 안티도 기하급수적으로 늘긴 했지만.

그리고 르브론 제임스에게 두 번째 FA가 다가왔다. 르브론 제임스는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트'에 장문의 편지를 남겼는데, 마지막 문구가 모든 이들을 놀라게 했다. "난 집에 돌아간다"("I’m coming home")말로 편지를 마무리하며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 2기를 시작했다. 르브론 제임스는 집으로 돌아온 지 2년 만에 클리블랜드 캐빌리어스에 구단 첫 NBA 우승 트로피를 안겨다 주었다. 집으로 돌아온 이유를 결과로 증명한 것이다. 

물론 지금은 다시 LA 레이커스로 집을 나간 상황이지만 클리블랜드 캐빌리어스의 향후 영구결번 명단에 르브론 제임스가 포함되는 것은 명백하고 자명한 일이다.

 

르브론도 집으로 돌아가는데, 나라고 못 갈라고?

NBA에는 6개 디비전 30개 팀이 모여있다. NBA 역사도 70년을 넘기에 그에 따른 각 팀의 역사 또한 유서 깊다. 고로 NBA 모 팀의 모든 역사를 통틀어 가장 대표적이고 유명한 선수가 된다는 것은 긴 설명 필요 없이 무한한 영광이다. 'A팀이라면 누구'라는 공식이 성립하는 셈이니까. 이 것의 대표적인 NBA의 사례가 미네소타 팀버울브스의 '늑대 무리 대장' 케빈 가넷이었다.

미네소타 팀버울브스의 전성기 시즌은 '2003-2004'다. 미네소타 팀버울브스의 팀 최고 성적은 디비전 우승을 거두었던 2004년이었고 당시 승률 역시 82경기 58승 24패로 .707를 기록했다. 그 중심에는 케빈 가넷이 있었고 NBA '2003-2004' 시즌 MVP 역시 케빈 가넷의 것이었다. 이 정도면 결론 내리는데 큰 무리는 없다. 미네소타 팀버울브스 영광의 정점에 케빈 가넷이 있었다. 케빈 가넷은 곧 미네소타 팀버울브스 그 자체였다.

▲ (사진: 미네소타 팀버울브스 공식 홈페이지)
▲ (사진: 미네소타 팀버울브스 공식 홈페이지)

2007년 그러던 그가 보스턴 셀틱스로 이적했다. 팀의 상징과도 같았던 선수를 당시 미네소타 팀버울브스 구단도 대우하지 않았고 케빈 가넷도 이적을 꺼려했지만 결국 보스턴의 녹색 유니폼을 입게 됐다. 케빈 가넷의 이적 효과는 곧 바로 나타났다. 케빈 가넷 옆에 폴 피어스, 레이 알렌이라는 수준급 슈터들이 뒷받침해줘 보스턴 셀틱스는 2008년 22년 만에 NBA 파이널 우승 트로피를 거머쥐었다.

보스턴 셀틱스에서 절정의 기량을 뽐냈지만 ‘늑대 무리 대장’은 늙어갔고 집을 그리워했다. 2013년 브루클린 네츠로 이적하지만 별 다른 활약을 보이지 못 하고 트레이드 마감 시간이 다가오자 테디어스 영과 트레이드돼 미네소타 팀버울브스로 돌아왔다. 복귀 확정을 알리는 기자회견에서 케빈 가넷은 "르브론도 집으로 돌아가는데, 나라고 못 갈라고?"("If LeBron can go home, why can't I?")라는 말을 남기며 미네소타 팬들의 가슴을 적셨다. 구단은 '늑대 무리 대장'의 복귀를 별도로 제작한 영상 제작과 함께 행사를 마련하여 반겼다. 

아직까지도 미네소타 팀버울브스 구단 역사를 되짚어봐도 케빈 가넷 이상의 스타는 없다. '늑대 무리 대장'이 집으로 돌아오는 것은 어쩌면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뜨거운 환대를 받으며 복귀한 케빈 가넷의 미네소타 팀버울브스 영구결번도 단지 시간문제일 뿐이다.

 

마침내 집으로 돌아왔다

2000년대 후반부터 2010년대 초반까지 세계 축구의 중심은 누가 뭐래도 스페인이었다. '티키타카'라는 짧은 패스와 점유율이 주가 되는 축구 전술은 세계를 강타했으며, 스페인 축구는 'UEFA 유로 2008 오스트리아·스위스', '2010 FIFA 월드컵 남아프리카 공화국', 'UEFA 유로 2012 폴란드·우크라이나' 3개의 대회를 전부 석권해버렸다. 축구는 골을 넣어야 승리하는 법, 당시 스페인 축구의 득점 담당은 페르난도 토레스였다.

페르난도 토레스는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에서 프로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2002-2003' 시즌부터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의 주포로 활약하기 시작하여 '빅 클럽'들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페르난도 토레스는 2007년 리버풀 FC로 이적하여 2011년까지 활약했는데, 2008년에는 발롱도르 3위까지 오르는 등 자신의 이름값을 더 높였다. 그렇게 페르난도 토레스는 2011년 겨울 이적시장 마감을 앞두고 3번째 팀 첼시 FC로 향했다.

▲ (사진: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공식 홈페이지)
▲ (사진: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공식 홈페이지)

페르난도 토레스는 첼시 FC로 이적하며 더 유명해졌다. '먹튀'의 대명사로 전락하여. 첼시 FC 소속으로 '2010-2011' 시즌 잔여 14경기에서 골을 넣어야 하는 스트라이커 페르난도 토레스는 단 1골 만을 넣었다. '2011-2012 잉글랜드 프리미어 리그'에서도 골을 넣어야 하는 스트라이커 페르난도 토레스는 총 855분 동안 '무득점'을 기록했다.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에서 스타로 급부상해 여러 '빅 클럽'들의 이적 제안을 골라보던 시절, 리버풀 FC에서 폼의 절정을 보여주던 시절과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파란 옷을 입은 페르난도 토레스는 나락으로 떨어지고 만 것이다. 

첼시 FC에서 AC 밀란으로 임대 이적해도 기대에 부족한 활약은 여전했다. 결국 첼시 FC는 AC 밀란으로 페르난도 토레스를 완전 이적시키고 AC 밀란도 곧바로 2015년 겨울 이적 시장 때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로 임대 후 이적 시켰다. 이적 확정 후 페르난도 토레스는 자신의 트위터에 "마침내 집으로 돌아왔다"("At last back home")는 글을 남겼고, 곧 치러진 마드리드 더비에서 2골을 넣어 극적인 무승부를 만들어내며 자신이 집에 돌아왔음을 축구로도 선포했다.

이후 페르난도 토레스는 효과적인 득점을 연신 성공시켜 2016년 2월 7일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유니폼을 입고 100번째 골을 성공시키도 했다. 페르난도 토레스는 일본 리그를 마지막으로 현역에서 은퇴했다. 그리고 다시 집으로 돌아와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후베닐 A(19세 미만) 감독을 맞고 있다. 누가 뭐래도 페르난도 토레스의 집은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다.

 

대국민적 서사의 시작

박지성도 PSV 에인트호번에서 유럽 축구의 시작, 선수생활 마무리를 동시에 해냈지만 박지성의 집, PSV 에인트호번은 네덜란드 축구팀이라 다소 아쉽다. 한국에서 시작해 한국으로 돌아온, 박지성만큼이나 우리나라 국민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던 선수가 있다. 그가 바로 김연경이다.

2005년 '여자 김세진'이라는 평을 들으며 화려하게 주목받아 천안 흥국생명 핑크스파이더스(현 인천 흥국생명 핑크스파이더스)에 드래프트 된 김연경은 데뷔하자마자 득점상, 공격상, 서브상, 신인상, 정규리그 MVP, 챔피언결정전 MVP를 싹 쓸어 버려 빛나는 흥국생명 1기를 보냈다. 

▲ (사진: 인천 흥국생명 핑크스파이더스 공식 홈페이지)
▲ (사진: 인천 흥국생명 핑크스파이더스 공식 홈페이지)

2009년부터 시작된 외국리그 선수 생활에서도 김연경의 성공가도는 그치질 않았다. 일본 JT 마블러스, 터키 페네르바흐체와 엑자시바시 비트라에 수많은 우승컵들을 직접 안겨다 주었다. 특히 '2011-2012' 시즌에서는 페네르바흐체 소속으로 유럽 최강 여자 배구팀을 가리는 CEV 챔피언스 리그에서 팀을 우승시키고 MVP까지 올라 부정할 수 없는 세계 최고의 배구선수로 올라섰다.

2020년 코로나19가 세상을 뒤덮고 정상적인 리그 진행이 세계 각국에서 어려워지자 김연경은 드디어 2020년 6월 11년 만의 국내 복귀를 선언한다. 국내 배구 리그 샐러리캡 제도로 많은 금액의 연봉 삭감이 예상됐는데, 언론이 처음 예상했던 연봉 7억 원보다도 반이나 적은 3억 5천만 원에 계약해 인천 흥국생명 핑크스파이더스로 금의환향했다.

물론 '2020-2021' 시즌이 김연경 배구 인생에 있어 가장 힘들었던 시기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김연경은 프로의식을 잃지 않고 팀을 준우승으로 이끌었으며 나아가 여자 배구의 흥행 그리고 '2020 도쿄 올림픽'의 투혼으로 이어 국민들에게 큰 감동을 전달했다. 김연경의 금의환향은 단순히 국내 복귀로 정의할 수 없다. 시즌 중 고난도 있었지만 '2020 도쿄 올림픽' 4강 신화까지 이르는 대국민적 서사를 알리는 시작이었기 때문이다. 

 

 

스타는 돌아와도 스타

세계 각국 모든 스포츠의 프로 구단에게 있어, 한 선수가 단 한 번의 이적 없이 은퇴까지 활약해준다면 극진히 대우해줄 수 밖에 없다. 그러나 그 '원클럽맨'이 된다는 것은 상당히 어렵다. 선수나 구단이나 상황의 입장이 매번 달라지기에.

위 선수들은 '원클럽맨'이 아니다. 그럼에도 이들이 '집'으로 돌아올 때 그 '집'의 팬들이 마치 '레전드' 맞이하듯 환대했다. 그들의 영향력은 '집'을 떠나 있었을 때도 여전했다는 뜻이며, 그 영향력이 추억이란 감성과 결합돼 환대라는 방식으로 '집'으로 돌아온 그들을 반긴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많이 벌어져야 한다. 선수, 구단, 팬들에게 긍정적인 '시작과 끝'을
꿈 꿀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모두에게 긍정적 효과를 낳을 다음 '컴백홈'의 주인공은 누구일까?

관련기사

저작권자 © 맨즈랩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