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dt 01410

모뎀을 기억하는 아재가 있다면 반가운 용어일 것이다.

PC에 장착된 모뎀을 통해 일반 전화라인을 이용하여 01410 번호를 가지고 있는 하이텔 PC 통신망 서비스에 전화를 거는 명령어이다.

1994년 이었던가, 전화국에서 -PC 없이도 통신이 가능한 1200~2400bps 속도의- 하이텔 단말기가 무료로 대여되기 시작하면서 빠르게 PC 통신은 보급되었고···. 그렇게 우리는 하이텔(한국통신), 천리안(데이콤, 현 미디어로그), 나우누리(나우콤) 삼형제가 제공하는 PC 통신을 즐겼다. 그리고 1998년과 1999년으로 이어지던 그때는 비약(?)적인 속도로 발전한 56Kbps dial-up(전화) 모뎀을 이용했다.

'시샵/시솝'이 운영하는 동호회에 가입하여 회원들과 정보를 공유하고, 얼굴 모르는 이들과 순수한 '채팅'도 밤새 즐겼다. 까만 화면에 텍스트로 화려하게 장식하는 'ANSI 아트'를 잘 쓰는 사람들은 존경의 대상이었다. 악플러도 없었고 끈끈한 정도 있었다. '자료실'에서 다양한 프로그램을 다운받고, 조금씩 보여지는 '야사'에 흥분하며 중간에 끊어지지는 않을까 노심초사도 했었다. 물론 전화세 걱정없는 '야간정액제' 서비스에도 가입해야 했다. 그리고 각 통신사의 부가 서비스로 인터넷에도 접속할 수 있었다. 그래···. 그 시대를 지나온 유저들이라면 전화세 때문에 어머님께 등짝 스매싱을 당한 기억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우리집은 항상 통화중이었다.

▲ 동호회 대문을 비롯해 채팅창에서 고수들이 구사했던 ANSI 아트. (또는 ASCII 아트) 정말 art 맞다!
▲ 동호회 대문을 비롯해 채팅창에서 고수들이 구사했던 ANSI 아트. (또는 ASCII 아트) 정말 art 맞다!
▲ 하이텔 단말기 (이미지 출처 : http://ch5.net)
▲ 하이텔 단말기 (이미지 출처 : http://ch5.net)
▲ 1990년대 초반, KT는 일명 '하이텔 단말기'를 일반 사용자에게 무료 대여했었다. 물론 하이텔 이용자 확보와 전화 사용량을 늘리는 것이 목적이었을 터. 입력장치(키보드)와 모니터, 그리고 전화모뎀이 내장된 일체형 단말기로 컴퓨터 없이 전화선만 연결하면 PC 통신망에 접속할 수 있었다 (이미지 출처 : http://labyrins.egloos.com/1968846)
▲ 1990년대 초반, KT는 일명 '하이텔 단말기'를 일반 사용자에게 무료 대여했었다. 물론 하이텔 이용자 확보와 전화 사용량을 늘리는 것이 목적이었을 터. 입력장치(키보드)와 모니터, 그리고 전화모뎀이 내장된 일체형 단말기로 컴퓨터 없이 전화선만 연결하면 PC 통신망에 접속할 수 있었다 (이미지 출처 : http://labyrins.egloos.com/1968846)

지금도 인터넷 없는 PC는 상상도 할 수 없듯이 전화선을 이용한 통신은 학습과 게임에 국한되었던 폐쇄적인 개인용 컴퓨터의 용도를 크게 바꿔 놓았다. 전화선과 컴퓨터를 이어주는 매개체가 바로 전화(Dial-Up) 모뎀이다.

특히, 56K Dial-Up 모뎀은 전화선을 이용한 통신속도의 한계로 전화 모뎀으로서는 마지막 주자였다. 56K? 그 의미가 의아한 독자도 있으리라. 과거 전화 모뎀의 경우 80년대 2600bps - 4800bps를 지나 90년대 초에는 9600bps를 시작으로 14400bps - 24Kbps - 36Kbps 까지 발전하였고, 90년대 말 부터 2000년 대 초반까지는 56Kbps 속도를 사용했다. 그러나 1999년부터 도입되었던 xDSL 기술의 발달과 보급, 그리고 전용선까지 등장하는 등 인터넷의 급속한 발달로 자연스럽게 전화 모뎀은 사라졌다.

bps는 'Bit per Second'의 약자로 초당 전송 비트수를 의미한다. 마지막 주자였던 56Kbps는 이론상 초당 57600bit 를 전송하며, 이를 cps(character per second, 초당 전송 문자 수)로 환산하면 대략 6400cps(초당 6400개의 글자를 전송)의 전송량을 가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실제로는 6000cps를 넘는 경우는 거의 없었고 잘 나와줄 때는 5000cps 초반대, 보통은 4000cps 대의 전송량을 보였다. 요즘은 기본 100Mbps 요, 아무리 못해도 3Mbps 이상 속도의 인터넷을 이용 중일 텐데···, 3Mbps를 cps로 환산하면 약 400000cps(약 340KB/s)로 56K 모뎀 평균 속도의 100배 수준이다. 격.세.지.감.

 

▲ 모뎀을 이용해 PC 통신을 즐기고 각 통신사가 제공하는 전용 브라우저를 사용해 인터넷에 접속하는 방식이 주를 이뤘던 98년 인터넷 초기 시절의 천리안, 유니텔(삼성SDS), 신비로(온세텔레콤)의 광고. 이 시기를 기점으로 대학생들에게 유독 인기를 끌었던 PC 통신의 강자 나우누리는 점차 쇠퇴의 길을 걷는다. 그리고 이 시기 전용 GUI 클라이언트 방식의 채널아이(LG인터넷)와 넷츠고(SK텔레콤)가 신흥강자로서 큰 인기를 얻었다.
▲ 모뎀을 이용해 PC 통신을 즐기고 각 통신사가 제공하는 전용 브라우저를 사용해 인터넷에 접속하는 방식이 주를 이뤘던 98년 인터넷 초기 시절의 천리안, 유니텔(삼성SDS), 신비로(온세텔레콤)의 광고. 이 시기를 기점으로 대학생들에게 유독 인기를 끌었던 PC 통신의 강자 나우누리는 점차 쇠퇴의 길을 걷는다. 그리고 이 시기 전용 GUI 클라이언트 방식의 채널아이(LG인터넷)와 넷츠고(SK텔레콤)가 신흥강자로서 큰 인기를 얻었다.

일반 전화라인을 이용했던 만큼 모뎀에는 Line 단자와 Phone 단자가 공존한다. Line 단자에는 전화선을, Phone 단자에는 일반 전화기를 연결하면 되는 것. PC 본체만큼이나 크고 무거운 CRT 모니터를 사용했던 만큼 책상 위는 늘 공간이 부족했다. 그렇게 또 인기를 얻은 것이 바로 '사오정 전화기'이다. 모뎀의 Phone 단자에 바로 연결해 사용했던 이 사오정 전화기는 일반 전화기보다 가격도 저렴하면서 크기도 작아 양면 테이프를 이용해 PC 케이스에 부착할 수 있는 등 컴퓨터 액세서리 마냥 사용했다. 더불어 마이크와 이어폰으로 구성된 이어셋/핸즈프리 방식으로 통화가 가능해 제법 폼도 났다.

▲ 전화기를 내장한 최초의 PC 케이스 '씨더'의 광고(1999년) 그리고 사오정 전화기와 전화 모뎀
▲ 전화기를 내장한 최초의 PC 케이스 '씨더'의 광고(1999년) 그리고 사오정 전화기와 전화 모뎀

맞다. 씨더(Cedar)라는 PC 케이스도 있었다. 당시 용산 컴퓨터 상가의 각 매대에는 수많은 종류의 사오정 전화기가 진열/판매되고 있었을 만큼 큰 인기를 끌고 있었는데, 이러한 시대적 흐름을 타고 등장한 제품이다. 바로 PC 케이스와 사오정 전화기를 결합한 것. 물론 PC의 전원이 꺼져있어도 전화기는 사용이 가능했다. 당시 이 PC 케이스도 컴퓨터 상가의 매대에 흔하게 볼 수 있는 등 꽤 주목을 받았으나 반짝하고는 사라졌다. 굳이 왜···. 아이디어는 좋았으나 사용성에서는 의구심이 들었던 것. 모뎀 이용 시에는 전화기를 사용할 수 없었던 당시의 환경이었던 만큼 전화기와 모뎀은 꽤 친숙한 관계였다.

▲ 경북대학교 '하늘소' 동아리에서 제작한 -가장 대중적인- PC 통신 프로그램 '이야기'
▲ 경북대학교 '하늘소' 동아리에서 제작한 -가장 대중적인- PC 통신 프로그램 '이야기'

PC 통신하면 빼 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접속용 프로그램이다.

도스(DOS) 시절 주로 사용되었던 PC 통신 접속 프로그램이었던 '이야기'를 지나 본격적인 윈도(Windows 95/98) 시대로 접어들면서 등장과 함께 공전의 다운로드 수를 기록하며 필수 소프트웨어로 자리 잡은 프로그램이 하나 있다. 바로 윈도용 텔넷 프로그램 '새롬 데이타맨 PRO 98'이다.

새롬 데이타맨 PRO는 깔끔한 UI 디자인과 함께 마우스를 지원하는 것이 특징이었다. 마우스? 당연한 것이 아니냐고 생각할 독자도 있겠지만, OS로 윈도 98을 사용한다 하더라도 PC 통신의 경우 접속되면 VT 모드에서 텍스트로서 메뉴를 뿌려준다. 그리고 각 메뉴 앞에는 번호가 존재했으며, 이 번호를 직접 타이핑해 해당 메뉴로 이동했다. 원하는 서비스와 동호회/게시판 등으로 이동하려면 관련 상위 메뉴의 번호부터 하위 메뉴까지 해당 번호를 일일이 타이핑해야 하는 등 여러 단계를 거쳐야 했다. 이러한 불편함을 줄이기 위해 'go 명령어'를 많이 사용했다. 각 서비스별로 고유의 키워드가 존재했는데 go chat 하면 채팅 서비스로, go pds 하면 자료실로 바로 이동하는 형태. 더불어 초기 메뉴 이동, 새로 고침, 목록 보기, 글쓰기, 답변쓰기, 검색, 메일 읽기 등 다양한 명령어도 존재했다. 이는 통신마다 그 체계와 명령어가 조금씩 달랐다.

이를 구현한 사이트도 존재한다. 이해가 잘 안 되거나 그 시절이 그리운 독자는 접속해 보기 바란다. 스피커 볼륨을 높이면 추억의 모뎀 소리도 들을 수 있다. ▶ www.atdt01410.net

▲ 응답하라 추억의 PC 통신 대화방 / www.atdt01410.net
▲ 응답하라 추억의 PC 통신 대화방 / www.atdt01410.net

새롬 데이타맨 PRO는 이런 복잡한 메뉴 이동을 마우스 커서를 해당 메뉴 위에 가져다 놓고 클릭하는 것만으로 이동할 수 있도록 구현했다. 그리고 설치 시 이용 중인 통신망 서비스를 선택하면 해당 통신사에 최적화된 메뉴 구성과 설정을 자동으로 해준다. 또한, 자주 사용하는 명령어는 매크로까지 구성할 수 있는 등 윈도 시대에 어울리는 다양한 기능들로 더욱 편리하고 쉽게 PC 통신을 즐길 수 있도록 돕던 프로그램이었다.

당시 새롬 데이타맨 PRO 98은 1만 원 이하의 저렴한 가격에 유료로 판매되는 프로그램이었지만 완제품 PC 또는 모뎀 구매 시 딸려오는 번들프로그램 등을 이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1997년 IMF 외환위기 당시 개인 사용자에게는 제한 없이 사용할 수 있는 '새롬 데이타맨 98 IMF' 버전이 등장하기도 했다.

▲ 새롬 데이타맨 98 IMF 버전을 이용, 텔넷을 통해 천리안에 접속한 화면
▲ 새롬 데이타맨 98 IMF 버전을 이용, 텔넷을 통해 천리안에 접속한 화면
▲ 새롬기술이 유통했던 '새롬 윙스' 모뎀과 사운드카드, 56K 모뎀 표준 규격을 지원하는 '새롬 비비텔 56K V.90'
▲ 새롬기술이 유통했던 '새롬 윙스' 모뎀과 사운드카드, 56K 모뎀 표준 규격을 지원하는 '새롬 비비텔 56K V.90'

이러한 인기 소프트웨어를 만든 주식회사 새롬기술(SEROME Technology, Inc.)은 1999년 초, '윙스'(wings)라는 브랜드명으로 모뎀과 사운드카드도 직접 유통했으며, 모뎀의 경우 새롬 데이타맨 98 정품이 제공되어 PC 통신 입문 사용자들에게 큰 환영을 받기도 했다. 사실 베스트 소프트웨어인 새롬 데이타맨 때문에 윙스 모뎀을 구매하는 사용자들도 많았다. 더불어 윙스 PCI 모뎀의 경우 당시 사용자들로부터 뛰어난 안정성을 가진 모뎁 칩세트로 잘 알려진 '락웰 PCI 칩'이 탑재되어 높은 관심을 받기도 했다.

또한, 56Kbps 고속 모뎀 표준 규격이 V.90으로 채택되면서 업체들 역시 이를 지원하는 모뎀 판매에 열을 올렸는데···, 새롬기술도 V.90 표준 규격을 지원하고 락웰의 새로운 칩세트를 내장한 '비비텔 56K V.90'을 출시하고 그 인기를 이어갔다. 역시 이 제품에도 새롬 데이타맨/팩스맨/북맨 등 새롬기술의 소프트웨어가 번들 되어 있었다.

잠시만! 56K 모뎀의 표준안?
56K Dial-Up 모뎀이 서서히 보급되기 시작한 1997년. 56K의 프로토콜 표준안을 두고 상당히 오랜시간 진통을 겪었다. 그것이 바로 락웰 등의 플렉스 진영과 US로보틱스의 X2 진영간의 표준안 싸움이었다. 당시 56K 모뎀들은 한쪽만을 지원한 채 출시되었으며 각 통신사들 역시 이러한 전송 프로토콜 문제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 연출되었고 결국 56K 속도를 제대로 누릴 수 없는 사용자들에게 그 피해는 돌아왔다. 결국 양 진영은 한발씩 양보하고 합의를 이루었고 1998년 3월 국제전기통신연합(ITU)이 56K 모뎀의 새로운 국제표준으로 V.90이 채택되었다. 그렇게 56K 서비스가 정식으로 시작되었고 윈도98이 대중화 되기 시작하면서 윈도우만을 지원하는 PCI 방식의 윈모뎀들이 선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명품 대접을 받았던 3COM US로보틱스 56K PCI 모뎀도 이 시기(1999년 3월)에 출시 되었다.

잠시만! 3COM US로보틱스?
1999년 초는 모뎀 시장에 큰 변화가 일어난 시기였다. 개인용 컴퓨터 모뎀 업계의 원조(이 회사의 모뎀 명령어 체계를 업계가 따랐다)라 할 수 있는 미국 Hayes사가 부도처리 되었으며, 유명한 락웰사도 어려운 분위기를 바꾸고자 구조조정 등을 거치며 시장점유율이 줄어드는 추세였다. 이 시기 락웰사는 사명을 Conexant로 변경한다. 이 시기 모뎀 시장에서는 Lucent사와 더불어 서버 네트워크 시장에서 안정성을 강점으로 강세를 보였던 3COM사의 모뎀 칩세트가 점유율을 높이고 있었는데, 3COM과 네트워킹 디바이스 전문 기업인 US로보틱스가 합병을 하게 된다. 이로써 3COM US로보틱스는 모뎀 시장에서 경쟁자 없는 독주체제를 갖추게 되면서 세계 판매 1위 타이틀을 갖게 됐다.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모뎀'이라는 타이틀로 등장했지만 국내 시장에서는 이미 자네트사의 56K 모뎀이 입소문을 타며 높은 점유율을 가지고 있던 터라 이름값은 못했다. 가격도 3COM답게 꽤 높았다. 1999년 기준으로 당시 모뎀은 보통 3~4만 원대 였으나 3COM US로보틱스 모뎀은 6~7만 원대의 가격이었다. 소위 명품이라 일컬어졌던 US로보틱스 외장형 56K 모뎀은 10만 원을 훌쩍 넘긴 13만 원대의 고가였다.

▲ 당시 명품 대접을 받았던 3COM US로보틱스의 PCI 모뎀(1999년)
▲ 당시 명품 대접을 받았던 3COM US로보틱스의 PCI 모뎀(1999년)

이야기가 많이 샜다. 여하튼 통신 분야에 있어 독보적인 존재감과 함께 관련 기술을 가지고 있었던 새롬기술은 오상수 사장 등 한국과학기술원 전산과 석사 출신들이 1993년 7월에 설립한 회사다. 그리고 1994년 (주)새롬기술로 법인전환을 하고 다양한 통신 관련 소프트웨어를 개발, 1997년에는 제1회 벤처기업 대상을 받았다.

새롬기술의 첫 소프트웨어이자 성장에 큰 역할을 한 '팩스맨'(문서 송수신 프로그램)을 비롯하여, '데이타맨'(문자 정보 전송 프로그램), '보이스맨'(자동응답 기능을 갖춘 음성정보 송수신 프로그램), '페이저맨'(삐삐라 불리웠던 무선호출기·페이저 호출 프로그램), '북맨'(주소록 관리 프로그램), 1997년 장영실상을 수상한 '텔레맨'(화상통신 프로그램) 등 통신과 관련된 다양한 소프트웨어를 선보이며 국내외에 큰 판매량을 보였다. 1998년 처음 출시해 1999년까지 최고 인기 소프트웨어로 군림했던 '새롬 데이타맨 98' 역시 벤처기업 우수제품에 선정되었다. 그리고 새롬 데이타맨을 선보인 그해 1998년 8월, 코스닥에 상장하게 된다.

1999년 10월 미국에서 큰 관심을 불러일으키며 등장한 인터넷 무료 서비스로 새롬기술은 또 한 번의 집중적인 포커스를 받게 된다. 그것이 바로 2000년 1월 국내에도 공식 서비스되기 시작한 인터넷 무료 전화 서비스 '다이얼패드' 였다. 1997년 말 외환위기로 본사의 지원이 거의 끊긴 새롬기술의 미국지사의 엔지니어들이 1년여 동안 고생하며 개발한 서비스이다. 새롬기술은 이 다이얼패드를 통해 일약 스타덤에 오른다. 주가는 100배 가까이 급등하였으며, '벤처 스타 기업'이라는 유행어와 함께 주식시장 최고의 황제주로 등극, 집중적인 관심을 받게된다.

 

▲ 당시의 다이얼 패드 웹사이트. 2004년 새롬기술에서 분리, VoIP 서비스 업체로 전환한 다이얼패드는 2005년 6월 야후에 인수되었다.
▲ 당시의 다이얼 패드 웹사이트. 2004년 새롬기술에서 분리, VoIP 서비스 업체로 전환한 다이얼패드는 2005년 6월 야후에 인수되었다.

다이얼패드는 사이트에 접속·로그인하여 다른 PC(PC-to-PC)나 일반 전화(PC-to-Phone)로 전화를 걸 수 있는 무선 인터넷전화(VoIP, Voice over Internet Protocol) 상용 서비스이다. '혁명'이라 평해지며 큰 관심을 받았던 다이얼패드의 성공으로 인해 새롬기술은 한때 시가 총액이 5조 원을 넘기도 했다. 광고를 보여주는 대신 공짜로 전화를 사용하는 '무료 서비스'였기 때문에 호기심을 자극했지만 사실 30만 명이라는 순간 동시 접속자 수 초과로 인하여 가물에 콩 나듯 이용할 수밖에 없어 실사용자들의 불만의 소리도 끊이지 않았다. 더불어 광고 외에는 특별한 수익구조가 없을 뿐더러 수 많은 유사업체의 등장 등 고전을 면치 못하다 결국 2005년 6월 야후에 인수되고 만다.

겉으로만 화려했었나. 빠른 성장만큼이나 추락도 빨랐다. 어려움을 겪고 있던 새롬기술은 2002년 11월, 1999년에서 2000년 사이에 적자가 발생했음에도 흑자가 난 것처럼 매출전표를 허위 작성, 분식회계를 통해 225억 원을 횡령한 혐의가 드러나 회계장부 조작 및 허위 공시로 오상수 사장이 구속(징역 2년 6개월)된다. 2003년에는 새롬기술의 자회사인 새롬벤처투자의 홍기태 사장이 새롬기술의 대주주가 된 이후 창업자인 오상수 사장의 퇴진을 요구하는 등 경영권 분쟁을 겪으면서 -주력 수익모델의 부재와 함께- 주가는 폭락했다. 엔지니어 출신으로 구성된 당시 새롬기술의 젊은 경영진의 운영 미숙이 한몫 단단히 했으리라.

물론 '벤처신화' 새롬기술은 아직 그 흔적이 남아있다. 새롬기술은 2004년 3월 (주)솔본으로 사명을 바꾸고 인터넷 미디어, 문화, 예술, 부동산 개발 등 '통신 관련 최고의 소프트웨어 기술 기업' 수식어와는 다른 모습으로 사업을 전개했다. 앞서 언급했던 새롬벤처투자의 홍기태 사장이 현 솔본의 대표이사 회장직을 맡고 있다. 카페 형식의 동호회 커뮤니티로 큰 인기를 누렸던 포털 사이트 '프리챌', 매트로에 이은 두 번째 무료신문였던  '포커스뉴스' 등의 모회사가 바로 솔본였다. 솔본은 현재 IT의료·헬스케어, 벤처캐피털, 골프 문화공간 등 다양한 전문 계열사를 두는 그룹사로서의 투자사업에 집중하고 있다.

 

야간정액제를 끊고 밤을 지새며···.

파란 ANSI 화면 속 정보 교류의 장이 되었던 그 공유정신···. 좋아하던 스타(라 쓰고 야사라 읽는다)의 이미지를 내려 받기 위해 조금씩 표시되던 모니터 속 사진을 바라보며 마음 졸였던 그 기다림의 미학. 정(情)으로서 서로를 존중하고 배려해 가며 채팅을 즐겼던 그 풋풋함. 그리고 그 향수를 자극하는 '모뎀 사운드', 그 시대를 풍미했던 '벤처기업 성공신화 새롬기술'···. 그립고 아쉽다. ⓒ 2017. ManzLab Corp.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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