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HDD(Hard Disk Drive)의 용량 증가를 보고 있으면, 1~2TB에 만족하는 우리네 생각과는 상당한 괴리를 느끼게 할 만한 제품들이 속속 등장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거의 모든 제조사가 12TB 제품을 내놓더니, 채 몇 달 지나지 않았건만, 이제 14TB 용량의 제품들이 발표되고 있지요. 

뉘라서 이렇게 용량 큰 드라이브를 갖고 싶지 않겠습니까. 14TB라니. 쓸 일이 없더라도 저 엄청난 용량의 HDD 하나쯤 내 PC에 달아 보고 싶어집니다. 더구나 요즘 콘텐츠의 덩치도 날로 커지고 있어 넉넉한 용량의 HDD가 누구에게나 필요해지고 있는 추세인 걸요. 

다만, 아직까지 10~14TB 용량의 HDD 가격은 좀 너무하다 싶을 만큼 비쌉니다. 그러니 울며 겨자먹기로 1~2TB를 구입할 수밖에요. 

 

▲ 씨게이트의 12TB HDD 라인업
▲ 씨게이트의 12TB HDD 라인업

1TB에 딱 만원, 그래서 10TB HDD를 십만원에 구입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어디까지나 소비자 입장에서의 바람이겠지만요. 

아무튼, 더 용량 큰 HDD가 지속적으로 출시돼야 그나마 기존 HDD의 가격도 낮아지므로 14TB 용량을 지원하는 HDD의 등장은 환영할 만한 일이긴 합니다. 그런데,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4~5TB 용량의 HDD에도 감탄사를 연발했던 우리였건만, 언제 이렇게 용량 큰 HDD가 개발될 수 있던 것일까요? 

 

 

역사에 등장한 헬륨

 맨즈랩의 다른 콘텐츠를 통해서도 HDD 용량 발전의 단초가 된 기술들을 몇 가지 소개한 바 있습니다만, 오늘은 이 중 핵심적인 역할을 한 ‘헬륨’에 대해 설명을 드릴까 합니다. 

이름조차 생소한 헬륨이라니, 도대체 이건 뭐지요? 헬륨은 지구상에 존재하는 여러 원소 중 한가지로, 대부분 기체상태로 존재합니다. 헬륨이 공기보다 가볍다는 정도의 사실은 알고 계시죠? 

 

▲ 폭발하는 힌덴부르크
▲ 폭발하는 힌덴부르크

이 헬륨이 주목할 만한 역사에 등장한 건 1937년입니다. 독일의 비행선 힌덴부르크(Hindenburg)가 미국 상공에서 거대한 폭발을 일으키며 추락한 사건이지요. 

당시엔 비행기보다 비행선을 주로 이용하던 시대였는데, 힌덴부르크는 당시로서도 가장 거대한 비행선이었습니다. 독일에서 출발해 미국까지 대서양을 횡단하는 비행선이었지요. 길이만 245m나 됐다니 규모가 짐작이 가시지요? 그런데, 이 비행선이 착륙 직전 한줄기 섬광과 함께 공중에서 폭발하는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이 사고는 비행선의 종말을 앞당긴 사건으로 역사에 기록됐습니다. 이 사고 이후 세계적 추세였던 비행선은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게 되고 말지요. 

아직까지 이 사고의 원인이 밝혀지고 있진 않지만, 대부분은 원인을 ‘헬륨’에서 찾고 있습니다. 비행선을 띄우기 위해서는 풍선 역할을 주머니에 공기보다 가벼운 기체를 담아야 합니다. 그래야 부력이 생겨 비행선을 띄울 수 있으니까요. 당시 대부분의 비행선은 여기에 헬륨을 담았습니다.

그런데, 잘 아시는 것처럼 독일은 2차대전 전범국이지요. 당시 헬륨을 만들어낼 수 있던 유일한 국가는 미국이었는데, 독일의 움직임이 수상하자 이 헬륨의 수출을 막아 버렸습니다. 그래서 독일은 어쩔 수 없이 저 거대한 비행선에 ‘수소’를 채우게 됩니다. 말 그대로 폭탄을 머리에 이고 있던 셈이니, 폭발사고가 발생한 게 어찌 보면 이상하지 않은 일인지도 모르겠네요. 

비행선의 시대가 지나간 후, 헬륨은 더이상 우리같은 소시민의 일상에 가까이 한 원소는 아니었지요. 금이라면 모를까요. 그저 학창시절에 배우는 원소 주기율표에서 그 이름 정도만 들어보았을 뿐입니다.  

 

 

왜 HDD에 헬륨을 넣게 됐을까?

 무한도전 등 프로그램에서 풍선에 든 기체를 마시고 목소리가 이상해지는 재미있는 현상이 TV를 탄 일이 몇 번 있죠. 마치 변조한 것같은 목소리가 나오게 만드는 기체, 손을 놓으면 하늘로 날아가 버리는 풍선에 채우는 기체, 이 기체가 바로 헬륨입니다. 

우리가 아는 헬륨이라야 고작 이정도가 전부가 아니었을까요? 그런데, 왜 이 헬륨을 HDD에 넣으려고 하는 걸까요? 

 

과거의 메가, 또는 기가급 HDD를 보면 상단에 작은 구멍이 하나 뚫려 있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어떤 제품은 이 구멍을 막지 말라고 주의 문구가 써있기도 했죠. 나중에 알려진 사실이지만, 이 구멍은 HDD의 ‘숨구멍’인 셈이었습니다.  

밀폐된 HDD 내부에서 플래터가 고속으로 회전하면 내부의 공기와 플래터가 마찰하며 높은 열이 발생하게 됩니다. 좁고 밀폐된 HDD 내부에 냉각팬을 달 수도 없으니 구멍을 뚫어 내부의 뜨거운 공기가 밖으로 배출될 수 있도록 만든 것이지요. 

물론, 안전장치도 꼭 필요했습니다. HDD는 데이터를 저장하는 플래터 표면 위 0.0001mm 이하의 미세한 거리를 두고 헤드가 떠다니며 데이터를 읽고 쓰는 장치입니다. 그런데, 그저 숨구멍을 뚫어두면, 이곳으로 유입되는 작은 먼지 하나도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하겠죠. 그래서 숨구멍, 일명 에어홀(Air Hole)에는 먼지를 막을 수 있는 필터가 장착됐습니다. 

 

▲ 질소를 사니 과자가 사은품으로 딸려왔어요~ 하는 느낌인가요?

또 내부가 공기로 차 있으니 고속으로 회전하는 플래터와 공기가 마찰하며 내부에 와류를 만들어내기도 했습니다. HDD 내부에 와류가 생기면? 회전하는 플래터가 이 와류와 부딛치면서 진동이 발생하겠지요. 그래서 정상적인 읽고 쓰기를 방해하게 됩니다. 

HDD 발전사에 IBM은 씨게이트(Seagate), WD(Western Digital) 등과 함께 중요한 역할을 한 기업이기도 합니다. 동일한 폼팩터에 더 많은 플래터를 밀어 넣는 기법은 주로 IBM이 많이 시도했던 걸로 기억됩니다. 당시 IBM은 하나의 HDD 내부에 플래터 5장의 플래터를 장착한 제품을 만들어 냈던 걸로 기억됩니다. 아마 데스크스타 DTTA, DPTA, DJNA 모델 중 하나였던 걸로...

이렇듯 HDD 내부에 공기를 채우면 앞서 설명한 문제점들이 발생합니다. 그래서 플래터를 아무리 많이 넣어봐야 5장 가량이 한계였지요. 오히려 5장의 플래터를 넣은 HDD도 한동안 출시되지 않았습니다. 온갖 부작용이 많았으니까요. 그래서 HDD 업계는 최근 새로운 방안을 모색하기에 이릅니다. 바로 HDD 내부를 공기가 아닌 다른 기체로 채우는 방법을요. 

헬륨은 그래서 등장합니다. 공기 대신 HDD 내부에 헬륨을 채워보자는 것이지요.  

 

 

헬륨을 넣어 얻을 수 있는 장점

최근 주요 HDD 제조사들은 속속 14TB HDD를 발표하고 있습니다. 도시바는 CMR 방식 14TB HDD를 발표했으며, WD 역시 SMR 방식의  엔터프라이즈 14TB HDD 울트라스타 Hs14를 발표했습니다. 씨게이트는 PMR 방식을 적용한 14TB 엔터프라이즈 HDD ‘엑소스 X14’를 발표했습니다. 

 

▲ Seagate Exos X14
▲ Seagate Exos X14

앞서 헬륨은 공기보다 가볍다고 말씀드렸죠? 헬륨이 공기보다 가벼울 수 있는 이유는 이 기체의 밀도가 매우 낮기 때문입니다. 밀도가 낮으니 HDD 내부의 플래터와 마찰의 정도도 낮아지겠죠? 이는 HDD 내부의 온도를 낮추는 효과와 더불어 내부의 와류 발생을 현저히 낮출 수 있습니다. 밀도가 낮은 기체를 HDD 내부에 채움으로써 이렇게 얻어지는 효과가 큽니다. 

 

▲ 헬륨을 채움으로써 플래터의 숫자를 늘릴 수 있었습니다
▲ 헬륨을 채움으로써 플래터의 숫자를 늘릴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변화가 있었을까요? 공기를 채울 때에는 5장의 플래터를 넣는 것도 버거웠습니다. 그런데, 마찰이 줄어드니 온도도 낮아지고 와류의 발생도 줄어들었습니다. 덕분에 하나의 HDD 내부에 더 많은 플래터를 장착할 수 있게 된 것이지요. 헬륨을 사용한 초기의 HDD가 약 7장 가량의 플래터를 달고 나오더니, 이제는 9장을 장착한 HDD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앞서 살펴본 14TB HDD가 바로 이런 제품들이지요.

내부의 마찰이 줄어드니 스핀들 모터를 고속으로 회전시키는데 필요한 전력도 적어졌습니다. HDD가 구동하는데 그리 많은 전력을 사용하는 건 아니지만, 헬륨을 채움으로 인해 약 20% 이상의 소비전력 절감이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플래터 수가 늘었는데도 말이죠. 

요즘 HDD의 플래터는 한 장에 1.5TB 이상의 데이터를 기록할 수 있습니다. 이런 플래터가 서너 장 이상 더 장착된다면, HDD 용량의 증가는 자연스레 따라올 수밖에 없겠지요?  믿기 어려운 14TB HDD를 달성하는 데에는 이렇듯 헬륨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그런데, 헬륨은 희귀원소 중 하나입니다. 우선 가격이 매우 비싸지요. 또 원소의 크기가 워낙 작아 밀봉이 매우 어렵습니다. 그래서 헬륨을 사용한 요즘의 HDD들은 가격이 비싼 것이지요. 그래도 조금만 더 저렴해지면 좋겠네요. 

 

 

헤드와 플래터 기술도 발전하고 있어

 앞서 SMR/PMR 같은 용어가 얼핏 소개됐었지요? HDD 용량을 높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건 분명 헬륨이지만, 헬륨 외에도 주목할 만한 기술적 진보들은 이어지고 있습니다. 

WD는 SMR을, 씨게이트는 PMR을 사용한 14TB를 발표했다 설명한 바 있습니다. 둘은 무얼 의미하는 걸까요? 이는 플래터에 데이터를 기록하는 방식을 말합니다. 하나의 HDD에 더 많은 플래터를 넣는 것은 가장 확실한 용량 증대의 방법이지만, 한 장의 플래터에 저장할 수 있는 데이터의 양을 늘리는 것 역시 효과적인 방법이 되겠지요. 

SMR과 PMR을 놓고 보자면, SMR이 더 앞선 기술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능은 PMR이 더 빠릅니다. 마치 MLC 방식의 SSD보다 TLC 방식의 SSD가 더 앞선 기술이지만, 정작 성능은 MLC가 더 빠른 것과 비슷한 이치라 볼 수 있겠네요. 

과거의 HDD들은 데이터를 수평으로 기록했습니다. 그래서 하나의 데이터(비트)를 저장하는데 지금보다 넓은 공간이 필요했죠. PMR(Perpendicular Magnetic Recording)은 이렇게 플래터 표면에 나열되는 자기를 수직으로 배열하는 기술입니다. 수직으로 데이터를 배열하면 하나의 데이터를 저장하는 공간이 작아지고, 결과적으로 동일한 면적에 더 많은 데이터를 기록할 수 있게 되지요.

 

▲ SMR 헤드 기술
▲ SMR 헤드 기술

SMR(Shingled Magnetic Recording)은 데이터의 수직 기록에 더해 데이터가 저장되는 트랙을 중첩해 사용하는 방식입니다. 트랙이 일정 부분 중첩되므로, PMR보다 더 높은 기록밀도를 달성할 수 있는 것이지요.

문제는, 중첩된 트랙 중 아랫부분의 데이터를 건드려야 하는 경우입니다. 겹쳐진 윗부분에 쓰인 데이터를 옮겨놓고, 아랫부분의 데이터를 기록한 다음 다시 윗 부분의 데이터를 원상태로 돌려 놔야겠지요. 이같은 방식 때문에 특정 구간에서 쓰기 성능이 급격히 떨어지는 문제점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때문에 고성능 드라이브의 경우 아직까지 PMR 방식이 각광받고 있는 것이지요. 

이밖에 플래터의 밀도를 높이기 위한 기술도 지속적으로 개발되고 있습니다. SMR 기록방식을 처음 도입했던 씨게이트는 이번엔 플래터에 레이저를 조사하는 HAMR 기술을 활용할 복안인 듯 싶습니다. 레이저를 이용해 플래터 표면을 순식간에 가열해 데이터를 보다 빠르게 저장하고, 더 높은 밀도를 구현하는 것이지요. WD는 마이크로파를 발생시키는 스핀 토크 발진기를 헤드에 달아 데이터를 더욱 촘촘하고 빠르게 기록하는 기술을 개발 중입니다. 

미래에는 플래터 자체에 매우 미세하게 미리 자기를 배열해 놓는 비트패턴 미디어가 사용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이런 방식을 사용하면 플래터의 밀도를 극한대까지 높일 수 있겠지요. 이렇듯 플래터 자체의 저장용량을 늘리는 기술, 그리고 헬륨 등을 이용해 더 많은 플래터를 HDD에 장착하는 기술 등이 두루 용량 증대를 위해 쓰이고 있습니다.

 

 

HDD의 생존전략

최근 PC를 보면, HDD는 서서히 주력 스토리지 자리에서 밀려나고 있는 느낌입니다. 이보다 빠른 SSD(Solid State Drive)가 OS 드라이브로 훨씬 각광받고 있죠. 에디터 역시 집에서 사용하는 PC에 두 개의 SSD를 장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고화질 멀티미디어 데이터 등 덩치 큰 파일을 저장할라 치면 불과 수백 기가바이트 용량의 SSD로는 턱없이 부족한 것이 현실이더군요. 그래서 저는 6TB HDD를 별도로 장착했습니다. 아마 대부분의 PC 사용자가 이런 형태의 PC를 사용하고 계시지 않을까 싶습니다. 

데이터의 생산량은 과거에 비할 바가 아니라고 합니다. 우리가 인스타그램에, 페이스북에 올리는 각종 포스트, 네이버 블로그나 포스트에 올리는 글은 어딘가의 서버에 저장되기 마련이죠. 이렇게 저장되는 데이터의 양은 우리네 상상을 훨씬 초월하는 수준이라는 것이죠.  

 

▲ HDD 기술도 빠르게 발전하고 있습니다
▲ HDD 기술도 빠르게 발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기업들은 많은 사용자가 빠르게 접근하는 데이터에 대해 SSD를, 거대하게 쌓여가는 데이터의 저장에 HDD를 사용하는 추세입니다. 특히, 단일 드라이브로 14TB 이상의 용량을 제공하는 HDD를 사용한다면 데이터센터의 규모를 줄이고 운영의 효율성을 높이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할 수 있겠지요. 

HDD의 성능 향상도 기대되는 부분입니다. 현재의 HDD는 초당 250MB 가량을 전송할 수 있는 수준까지 성능이 향상됐습니다. SSD에 비하면 아직은 미미한 수준입니다만, HDD 내부의 헤드를 각각 제어하는 멀티 액츄에이터 기술 등이 접목되면 HDD의 성능 또한 큰 폭으로 향상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됩니다. 

HDD의 성능이 향상된다 해서 SSD를 따라가기야 하겠습니까만은, 점점 거대해지는 데이터를 효과적으로 저장하고, 필요할 때 보다 쾌적하게 꺼내 쓰기 위한 수준의 성능을 제공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HDD의 생존에 필요한 제반 조건은 갖추어진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SSD와 비교할 때 동일한 가격에 압도적인 용량을 제공하는 현재의 기조가 깨지지만 않는다면 말이죠.

관련기사

저작권자 © 맨즈랩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