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축되지 않은 4K 영상 1 프레임을 저장하는데 필요한 저장공간은 약 25MB. 이 영상 1초를 저장하려면 750MB가 필요하며, 1분이면 45GB(기가 바이트)가 있어야 한다. 만일 이런 영상을 한 시간 저장한다고 생각하면? 2.7TB(테라 바이트)의 저장공간이 필요해 진다.

영상 압축기술도 빠르게 발전하고 있어 우리가 사용하는 동영상 파일의 덩치가 이렇게 크진 않다. 그럼에도 2시간 분량의 4K 영화 한 편을 저장하려면 적어도 200GB는 필요하다. 최근 관심을 얻고 있는 3D, 또는 VR을 지원하는 콘텐츠라면 덩치는 더욱 커지기 마련이다.

최근 무려 12TB(테라 바이트) 용량의 HDD(Hard Disk Drive)가 시중에 출시되며 우리를 놀라게 했지만, 고품질 콘텐츠를 저장하다 보면 이런 어마어마한 용량의 HDD도 금세 바닥을 들어내기 일쑤다. 하물며 속도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SSD는 더 말할 필요도 없고 말이다.

문득, 가장 오래된 HDD 제조사 씨게이트를 이끌던 윌리엄 왓킨스(William D. Watkins)의 명언(망언인가?)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솔직해지자. 우리는 세상을 바꾸는 것이 아니다. 단지 사람들이 쓸데없는 소프트웨어를 더 많이 사고, 야동을 더 많이 볼 수 있도록 돕는 물건을 만드는 것 뿐이다.”

 

20TB를 향한 새로운 도전

불과 십여 년 전만 해도 30~40GB 용량의 HDD에도 감지덕지했건만, 이제는 무려 1,000배나 많은 데이터를 하나의 HDD에 저장할 수 있는 시대가 돼 버렸다. HDD의 크기도, 데이터를 저장하는 방식도 변하지 않았건만, 이처럼 저장할 수 있는 데이터의 양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그런데, 그 사이 세상은 더욱 대담하게 변했다. 근사한 저녁자리의 이미지를 SNS에 올리는 개인적 일상의 기록부터 거리 곳곳에 설치된 수많은 CCTV의 영상에 이르기까지, 온 세상이 디지털로 저장되는 시대를 맞았다.

▲ 다양한 12TB HDD가 출시되고 있다

개인 사용자는 고품질 야동을 더 많이, 또는 고화질 영화나 고음질 음악 파일을 저장하는 용도로 활용하겠지만, 사회적으로는 온 세상이 시시각각 만들어내는 엄청난 양의 데이터를 저장해야만 하게 됐다. 그래서 엄청난 12TB의 용량도 부족하다고 아우성이다.

그래서 주요 HDD 제조사 씨게이트, WD, HGST 등은 벌써부터 20TB HDD를 목표로 다음 경쟁을 벌이고 있다. 우리가 상상할수조차 없는 거대한 데이터가 시시각각 만들어지는 세상이라면, 이 거대한 데이터를 보다 적은 수의 HDD로 저장할 수 있어야 경제성을 높일 수 있으니까.

 

초고용량 HDD를 위한 첨단의 기술

기록 표면의 자기를 수직으로 배열함으로써 수평으로 배열하던 기존의 방식보다 기록밀도를 높인 PMR(Perpendicular Magnetic Recording) 헤드 기술이 적용되며 대개 제조사의 HDD 용량이 급증하기 시작했다. 그간 HDD 제조사들은 이런 새로운 기술을 앞다퉈 적용함으로써 경쟁사의 고용량 드라이브에 대응해 왔다.

최근엔 씨게이트를 시작으로 SMR(Shingled Magnetic Recording) 기술이 채용되며 또 한번 용량의 증대를 이룩할 수 있었다. SMR 방식은 데이터가 기록되는 원판(플래터)의 트랙과 트랙 일부를 겹쳐 사용하는 방식으로, 이를 통해 동일한 면적에 더 많은 데이터를 저장할 수 있다. 다만, 이런 방식은 특정 영역에서 쓰기 속도가 하락하는 단점이 존재한다. 이로 인해 한 번 데이터를 저장하면 일정 기간 이상 사용보다는 저장을 위주로 하는, 소위 콜드 데이터 용으로 주로 활용되고 있다.

현재의 12TB 드라이브는 대개 고성능을 필요로 하는 영역에 사용되므로 주로 PMR 헤드 기술이 사용되고 있다. SMR 기술을 접목할 경우 현재의 기술로도 20TB의 벽을 넘을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되지만, 급격히 증가하는 데이터 만큼이나 수많은 사용자의 동시 호출이 빈번한 환경에 적합하지 않다는 점을 감안하면, 높은 성능을 유지하며 용량을 늘일 필요가 있다.

▲ WD의 MAMR 기술
▲ WD의 MAMR 기술

이를 구현하기 위한 기술이 속속 개발되고 있는데, 첫 번째로 주요 HDD 제조사인 WD가 발표한 MAMR(Microwave Assisted Magnetic Recording) 기술을 살펴보자. 드라이브의 크기가 정해져있는 상황에서는 저장되는 데이터의 밀도를 높여야 한다. 데이터의 저장밀도를 높이기 위해서는 모든 것이 더 미세해져야 한다. 수평으로 기록되던 자기를 수직으로 기록하는 것은 획기적이었지만, 이미 HDD 내부는 그러한 개선의 여지가 많지 않은 것이 사실. 때문에 더욱 정교하고 고밀도화된 장치로 데이터가 저장되는 영역을 최소한으로 줄여야만 한다.

이렇듯 동일한 양의 데이터가 저장되는 영역을 극한까지 줄이려면 데이터를 읽고 쓰는 헤드가 더 작아져야 한다. 자기를 이용하는 기존의 방식만으로는 이렇게 크기를 극한까지 줄이는데 한계가 따를 수밖에 없는데, WD는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 마이크로웨이브(극초단파)를 적극 활용하는 기술을 개발했다.

이 기술의 핵심은 스핀 토크 발진기(Spin Torque Oscillator)에서 찾을 수 있다. 스핀 토크 발진기는 마이크로파를 이용해 데이터를 저장하는 필드를 만들어낸다. HDD 내부 구조를 이렇게 변화시킴으로써 더 작은 헤드를 탑재할 수 있다. 헤드의 크기가 작아지면, 동일한 면적에 저장할 수 있는 데이터의 양은 자연스럽게 늘어난다.

WD는 이 기술을 이용해 평방 인치당 4Tb(테라 비트, 약 512GB)까지 저장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WD의 로드맵을 살펴보면, 이 기술을 이용해 오는 2025년까지 40TB 용량의 HDD를 출시할 계획이라고.

 

HAMR 기술을 발전시키는 씨게이트

주요 HDD 제조사는 동일한 기술을 사용해 엇비슷한 용량의 HDD를 출시하곤 했는데, HDD에 관련한 원천기술을 가장 많이 확보하고 있는 씨게이트의 경우 최신기술의 도입이 상대적으로 빨랐던 편이었다. 최근의 SMR 역시 씨게이트가 가장 먼저 도입했고 말이다.

문제는 PMR/SMR 기술 이후 차세대 초고용량 HDD를 위한 각 제조사의 기술이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는 점이다. 지금까지는 거의 동일한 기술적 기반 위에서 HDD가 개발돼 왔기 때문에 어느 제조사의 제품을 구매해도 성능이나 안정성의 차이가 크지 않았다면, 향후 각기 다른 기술이 적용된 HDD가 등장하는 시점에서는 제조사 간 성패가 명확하게 엇갈릴 여지가 있어 보인다.

WD가 초고용량 HDD 구현을 위해 MAMR 기술에 사활을 걸었다면, 씨게이트는 HAMR(Heat Assisted Magnetic Recording) 기술로 초고용량 HDD를 구현하려 한다. 어쩌면 이미 HAMR 기술을 성공적으로 도입한 씨게이트와, 이 방식에서 애로를 겪었던 WD의 각기 다른 입장이 이렇듯 기록방식에서의 차이를 만들고 있을지도 모를 일.

▲ 씨게이트의 HDD 기술 로드맵
▲ 씨게이트의 HDD 기술 로드맵

MAMR이 고밀도 저장을 위해 마이크로웨이브를 이용하는 방식이라면, HAMR은 레이저를 이용해 고밀도를 구현하는 기술이다. 레이저를 이용해 플래터 표면을 살짝 가열하면 매체가 자연스레 자화되고, 데이터를 기록하기 쉬운 구조로 변화한다. 데이터를 기록한 이후에는 빠르게 냉각시켜 기록 표면을 안정화 시킨다. 물론, 레이저를 조사해 기록면을 가열하고, 데이터를 기록한 후 냉각하는 일련의 과정은 우리가 가늠할 수 없는 나노초 단위의 ‘찰나’에 이루어진다.

이미 성공적으로 HAMR 기술을 도입하고 있는 씨게이트는 이 기술을 지속적으로 발전시켜 HDD의 저장밀도를 높일 수 있다고 설명한다. 씨게이트는 이 기술을 이용해 2020년에 20TB 제품을, 2023년까지 40TB 이상의 HDD를 출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이는 2025년까지 40TB HDD를 출시할 예정이라 밝힌 WD보다 훨씬 빠른 속도이다.

씨게이트가 이처럼 자신감을 내비치는 이유는 HAMR 기술을 향후 HDMR(Heated Dot Magnetic Recording) 등과의 연계를 계획하고 있기 때문이다. 레이저를 이용한 기록방식을 유지하며, 추가적인 기술의 진보를 결합하는 방식이다.

▲ HDD의 기록밀도는 여전히 가파르게 발전하고 있다
▲ HDD의 기록밀도는 여전히 가파르게 발전하고 있다

눈 여겨 보아야 할 부분은 BPM(Bit Patterned Media)이라 불리는 새로운 플래터 기술이다. BPM은 극도로 축소된 자기 입자를 기록면(플래터) 표면에 미리 배열하는 나노리소그래피(Nanolithography)를 이용하게 된다. 기존에는 헤드 기술의 발전을 통해 밀도를 높여왔다면, 이번엔 아예 초고밀도로 미리 자기 입자가 배열된 플래터를 이용한다는 복안.

레이저를 이용해 표면을 가열하면 비교적 넓은 영역으로 확대된 플래터에 데이터를 기록할 수 있고, 이후 냉각되면 열수축으로 인해 자기의 간격은 극도로 좁아지므로 앞서 설명한 HAMR 기술과 효과적인 접목도 가능하다.

물론, BPM 기술은 그 자체로도 혁명이라 부를 만한 용량의 증가를 이끌어낼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때문에 씨게이트를 비롯, 도시바, WD 등 주요 HDD 제조사가 이 기술의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ASTC(Advanced Storage Technology Consortium)는 이 두 기술을 결합해 평방인치당 100Tb(테라 비트, 12.5TB)까지 저장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는데, 예정대로 발전한다면 우리는 2025년 즈음에 100TB 용량의 HDD를 만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우수한 제품이 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는 제품이 우수한 것이다

10년에 한 번 꼴로 HDD는 용량의 한계에 부딪쳐 왔다. 반도체보다 훨씬 오랜 기간 핵심적인 저장매체로의 기능을 다해온 HDD의 발전사는 그 자체로 기술적 한계의 극복기였다 할 수 있다. 지금까지의 발전과정을 되짚어보면, 씨게이트가 조금 과감하게 새로운 기술을 채용하면 여타 제조사가 이를 적극 받아들이는 모양새였다. 물론, 엔터프라이즈와 리테일에서 소비자의 선호가 다르고, 상황에 따라 모델마다 선호가 극명하게 갈렸지만 말이다.

아무튼, HDD 업계는 저마다 성능과 용량의 혁신을 위한 기술개발에 몰두해 있다. SMR이 그랬듯, 향후 서로 다른 기술이 적용된 다양한 고용량 HDD의 출시가 늘 것으로 보이는 이유이다. 어떤 기술이 우리에게 더욱 큰 혜택을 주게 될까?

여기에 SSD의 등장으로 벌어진 성능의 차이 역시 HDD 진영엔 극복의 대상이다. 최근 HDD 업계는 멀티 액츄에이터(Multi Actuator) 기술도 함께 개발하고 있다. 기존의 HDD가 모든 헤드를 동시에 함께 움직였다면, 멀티 액츄에이터 기술은 헤드를 각기 제어함으로써 데이터를 읽고 쓰는 속도를 배가시킬 수 있는 기술. 초기 버전인 듀얼 액츄에이터 기술이 적용된 HDD로도 우리는 기존에 경험하지 못한 성능의 HDD를 경험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 우리는 머지 않은 미래에 100TB HDD를 만날 수 있다
▲ 우리는 머지 않은 미래에 100TB HDD를 만날 수 있다

아직 분명한 것은 없다. 더 진보한 기술이 적목됐다 해서 그 제품이 더 좋은 제품이라 할 수도 없다. 어떤 기술이 적용됐건, 사용자가 만족할 만한 품질과 가격, 용량을 제공하는 제품이 더 우수한 제품이 될 것이 명확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서로 다른 기술적 기반 위에 만들어지는 제품이기에, 향후 HDD 시장의 대부분이 어느 한 제조사의 제품으로 급격히 쏠리는 경향이 나타날 수도 있고 말이다.

이번 경쟁의 승자는 누가 될까? 전통의 씨게이트일까? 아니면 무서운 기세로 시장의 잠식에 성공한 WD일까? 둘 모두 아니라면, 최근 높은 안정성으로 재주목 받고 있는 HGST가 주인공이 될까? ⓒ 2017. ManzLab Corp.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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