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20년 하고도 5 ~ 6년은 더 지난 옛날 이야기. 당시 필자의 방엔 15인치 CRT 모니터, 8MB 메모리와 무려 486 프로세서가 탑재된 PC가 당당히 책상을 차지하고 있었다. 지금은 구글링을 통해서만 존재가 확인되지만, 당시 이만한 PC를 갖고 있다면 주변으로부터 부러움의 대상이 되곤 했다. 기억을 되짚어 보면, PC라 불리는 신박한 - 그러나 기실 별로 쓸 데는 없는 - 기기를 가진 사람이라야 친구 10여 명 중 서넛에 불과했던 시절이었으니 오죽 했을까.

하지만 정작 귀한 대접을 받았던 건 PC보다 수백장에 달하는 플로피 디스크였다.  PC를 PC답게 활용할 수 있는 데이터 - 거의 게임이었지만 - 를 복사하고 이동하거나 보관하기 위한 유일한 수단으로 플로피 디스크는 대안조차 없는 필수품이었다. 당시의 PC에는 대개 200~500MB(메가 바이트) 수준의 HDD(Hard Disk Drive)가 장착돼 있었지만, 데이터를 카피하고 이동할 수 있는 수단은 플로피 디스크가 유일했다.

▲ 한때 귀한 대접을 받았던 3.5” 플로피 디스크
▲ 한때 귀한 대접을 받았던 3.5” 플로피 디스크

전화선과 모뎀, 그리고 추억의 영화 속에서나 만날 법한 PC통신의 파란 화면이 전부였던 시대였으니, 그나마 PC를 이용해 무언가 할 수 있도록 유용한 데이터를 제공하는 플로피 디스크는 말 그대로 ‘보물’이었던 셈이다.

당시의 HDD는 비싸기도 비쌌거니와, 오늘날처럼 쉽사리 들고 이동할 만큼 튼튼하지도 않았다. 물론, 그 즈음은 필자 역시 PC를 뜯어 HDD에 직접 전원과 케이블을 연결한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었고 말이다.

때문에 PC를 가진 누구라도 각종 게임이나 유틸리티가 저장된 플로피디스크를 더욱 애지중지할 수밖에 없었다. 고작 1.2MB(메가 바이트), 또는 1.44MB 용량을 가진 플로피 디스크가 당시엔 무엇보다 중요한 데이터의 이동과 백업 수단이었던 셈이다.

 

10년 사이 10배로...

시계를 10년 전쯤으로 되돌려 보자. 재미있게도, 사용자들이 그렇게 애지중지하던 플로피 디스크는 십 몇 년이 흐르는 사이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그 사이 데이터를 기록할 수 있는 CD와 DVD가 한차례 바람을 탔지만. 외장하드와 USB 메모리 등이 등장하며 이 역시 크게 줄어들었다. 수백GB(기가 바이트) 이상의 데이터를 저장할 수 있는 외장하드, DVD의 용량을 훌쩍 뛰어 넘는 USB 메모리 등이 기존의 저장 미디어를 효과적으로 대체한 것.

HDD의 용량도 큰폭으로 발전했다. 90년대 후반 들어 기가의 벽을 돌파한 HDD는 이 즈음에 이르러 마침내 테라 바이트(TB)의 벽을 넘어섰다. 아울러 SATA1의 부족한 한계를 벗어 던진 새로운 인터페이스 SATA2가 부상하고 있었다. 

▲ 한계를 돌파한다는 점에서 1TB HDD의 등장은 떠들썩했다
▲ 한계를 돌파한다는 점에서 1TB HDD의 등장은 떠들썩했다

HDD 용량의 발전은 오히려 그 시점부터 더욱 빨라진 느낌이다. 인터넷의 폭넓은 보급에 이어진 스마트폰의 대중화, 각종 멀티미디어의 고품질화와 SNS의 부상 등으로 말미암아 전 세계적으로 데이터의 폭증현상이 나타났기 때문으로 풀이할 수 있어 보인다. PC 시장에서는 SSD의 부상으로 말미암아 데이터의 백업용 드라이브로 위상이 변경되고 있었지만, 거리 곳곳에 설치되는 CCTV 하나까지 디지털로 기록되는 시대를 맞아 저장해야 할 데이터의 양은 엄청나게 증가해 버렸다.

최근 씨게이트, 히타치, WD 등 주요 HDD 제조사들은 앞다투어 12TB 용량의 HDD 출하를 시작했다. 불과 십여 년 전 테라바이트의 영역을 넘어섰던 것을 상기해 보면, 지난 십년 사이 HDD는 동일한 크기의 드라이브로 딱 10배의 저장공간을 갖게 된 셈이다.

 

핵심은 기록밀도와 플래터

HDD가 동일한 크기를 유지하며 저장용량을 늘릴 수 있으려면, 내부적으로 어떤 변화의 과정을 거쳐야 할 것임은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일. 외부로 보기에 큰 변화 없이 동일한 외형을 수십 년 이상 유지해 왔음에도 저장용량의 발전이 컸다면, 내부적으로는 그만큼 큰 변화가 뒤따랐다고 예상할 수 있는 일이다.

HDD의 내부 구조는 우리네 생각만큼 복잡하지 않다. 하나의 드라이브로 12TB에 달하는 방대한 데이터를 저장하기 위해서는 각종 첨단기술이 적용되겠지만, 단순한 시각으로 보면 턴테이블 위에 올려진 LP 레코드와 이에서 음악을 읽어들이는 바늘과 닮아있다.

▲ HDD의 내부는 이렇게 생겼다
▲ HDD의 내부는 이렇게 생겼다

실제로도 그렇다. HDD는 데이터를 기록하는 둥근 원판(플래터)와, 이 위를 지나며 데이터를 읽고 쓰는 헤드로 구성돼 있다. 이렇듯 예상보다 단순한 구조라면, 저장공간을 높이기 위해 발전해야 할 기술도 보다 명확해 진다.

첫 번째는 기록밀도의 향상이다. HDD에는 적게는 한 장 부터 많게는 8장 가량의 플래터가 탑재된다. 당연히 한 장의 플래터에 기록하는 데이터의 양이 많을 수록 적은 수의 플래터만으로 고용량을 실현할 수 있게 된다. 물론, 이를 가능케 하기 위해서는 플래터 기술, 플래터에 데이터를 기록하거나 읽어들이는 헤드 기술이 함께 발전해야 가능한 일이다.

두 번째는 좀 더 많은 플래터를 탑재하는 방식이다. 한 장의 플래터에 1TB를 저장할 수 있다면, 플래터를 두 장 탑재하면 2TB, 네 장 탑재하면 4TB 용량의 HDD를 만들 수 있다. 따라서 기록밀도의 증가와 함께 더 많은 플래터를 하나의 HDD에 장착하는 기법 역시 용량을 늘릴 수 있는 주요한 수단이 된다.

 

지속적으로 높아져온 기록밀도

현재의 HDD는 한 장의 플래터에 무려 1.5TB의 데이터를 저장할 수 있는 단계까지 발전해 있다. 앞서 언급했지만, 플래터 한 장에 더 많은 데이터를 저장할 수 있으면 그만큼 더 큰 용량의 HDD를 만들어낼 수 있다. 때문에 오랜 기간, 데이터의 저장밀도 향상은 HDD 발전의 한 축이었다.

PC나 랙마운트에 장착되는 HDD는 크기가 3.5인치로 정해져 있다. 따라서 플래터의 크기 역시 정해져 있다 보는 것이 타당하다. 때문에 플래터의 크기를 키우는 방식으로 저장용량을 늘릴 수 없으므로, 반대로 동일한 데이터가 저장되는 면적을 극한까지 줄여야 한다.

이렇듯 데이터가 저장되는 면적을 극한까지 줄이면 동일한 면적의 플래터에 더 많은 데이터를 저장할 수 있다. 데이터를 읽고 쓰는 과정에서 헤드가 움직여야 하는 거리 역시 단축되므로 성능의 향상까지 꾀할 수 있다.

▲ 플래터 위를 마이크로 단위로 제어되는 헤드가 지나가며 데이터를 읽고 쓴다
▲ 플래터 위를 마이크로 단위로 제어되는 헤드가 지나가며 데이터를 읽고 쓴다

HDD의 용량을 획기적으로 개선할 수 있던 대표적 기술로 PMR(Perpendicular Magnetic Recording, 수직 기록 방식) 기술을 먼저 꼽을 수 있다. HDD는 자성을 가진 입자를 플래터에 배열하는 방식으로 데이터를 저장한다. 기존에는 이 가정물질을 플래터 표면에 수평으로 배열해 왔는데, 이를 수직으로 배열함으로써 동일한 면적에 더 많은 자기 입자를 배열할 수 있게 된 것.  최근 HDD의 용량이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초당 100MB 수준의 데이터를 읽고 쓰던 성능이 초당 250MB를 읽고 쓸 수 있는 수준까지 발전하는데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이 바로 이 수직 기록 방식이라 할 수 있다.

최근엔 PMR 방식보다 데이터의 저장밀도를 더 높일 수 있는 SMR(Shingled Magnetic Recording) 기술 역시 서서히 확대되는 추세. 이 방식은 기존의 헤드가 데이터를 저장하는 트랙의 끝 부분에 약간의 여분을 두던 것에 착안해, 해당 부분을 마치 기왓장 쌓듯 중첩해 기록하는 방식이다. 씨게이트의 자료에 따르면, SMR 방식을 이용하면 PMR에 비해 HDD의 기록밀도를 약 25%까지 증가시킬 수 있다고 한다.

다만, SMR 방식은 데이터가 중첩되는 위치에서는 급격히 성능이 떨어지는 단점이 아직 존재한다. 때문에 클라우드나 웹서버 등 꾸준한 성능이 요구되는 영역에서는 아직 폭넓게 채용되지는 않는 추세이다. 반면, 한 번 데이터를 기록하면 오래 저장하고, 필요 시에만 다시 전원을 연결해 데이터를 읽어오는 백업용 드라이브 - 콜드 데이터라 불리는 - 용으로 출시되고 있다. 

간혹 블로그 등에서 특정 브랜드, 또는 특정 HDD의 성능 하락을 지적하는 글을 보게 되는데, 이는 HDD의 문제라기 보다 용도에 맞지 않는 제품을 사용함으로써 발생하는 문제라 할 수 있다. 주기적으로, 그리고 빈번한 입출력이 발생하는 PC나 서버 등에는 아직 SMR 기록 방식의 드라이브는 조금 주의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용량을 늘리는 또 한가지 방법, 헬륨

HDD의 용량 발전은 어느 한 방향으로만 이루어지지 않았다. 플래터의 저장밀도를 늘리는 것만큼이나 더 많은 플래터를 장착하는 방식으로도 용량을 늘릴 수 있기 때문.

PC 영역에서 HDD는 가격에 비해 높은 저장공간을 지속적으로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SSD에 자리를 내주지 않을 수 있으며, 대형화되고 있는 개인의 데티어를 효과적으로 저장할 수 있다.

문제는 한정된 공간에 넣을 수 있는 플래터의 수는 제한적이며, 많은 플래터를 넣으면 넣을 수록 전력소모와 진동이 커지고, 이로 인해 드라이브의 안정성이 낮아진다는 점이다. 여기에 분당 5400회, 또는 7200회 회전하는 플래터가 다수 장착된 HDD는 고속으로 회전하는 플래터와 공기의 마찰로 엄청난 열이 발생하는 문제까지 안고 있다. 

▲ 헬륨을 사용함으로써 더 많은 플래터를 HDD에 장착할 수 있게 됐다
▲ 헬륨을 사용함으로써 더 많은 플래터를 HDD에 장착할 수 있게 됐다

이 문제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HDD 업계가 찾아낸 해법은 ‘헬륨’이다. 대기와 같은 ‘공기’가 충전되던 예전의 HDD는 플래터의 수를 늘릴 수록 앞서 설명한 예의 문제점들이 모두 나타난다.

결국 다량의 플래터를 HDD에 장착할 수 있으려면 HDD 내부에 채워지는 기체는 단순한 ‘공기’보다 밀도가 낮아 저항이 작게 발생해하는 성질이어야 한다. 여기에 공기보다 가벼워야 하며, 다른 원소 등에 반응해 HDD의 동작환경을 변화시키지 않아야 한다.

이같은 조건을 모두 갖춘 원소가 바로 헬륨이다. 수소 다음으로 가벼운 원소이며, 알려진 모든 원소 중 반응성이 가장 낮다. 때문에 플래터와의 마찰로 인한 열 발생이 적고, 어떤 원소와도 반응하지 않으므로 HDD 내부 환경을 초기와 동일하게 유지할 수 있다.

HDD 업계는 이 헬륨을 이용함으로써 마침내 마의 10TB 벽을 허물었다. HDD 내부를 헬륨으로 채우는 방식으로 공기와의 마찰로 인한 진동과 발열을 해결한 씨게이트, WD, 히타치 등 제조사는 하나의 HDD에 8장의 플래터를 장착할 수 있게 됐다.

앞서 설명한 플래터와 헤드 기술의 발전으로 한 장의 플래터에 1.5TB에 달하는 막대한 용량의 데이터도 저장할 수 있게 됐다. 1.5TB 플래터 8장, 그래서 우리는 마침내 12TB의 엄청난 용량을 가진 HDD를 만나게 됐다. 물론, 이렇게 만들어진 드라이브는 과거에 비해 안정성 역시 큰폭으로 향상됐다.

 

아직 끝이 아니다

최근 출시된 12TB 제품 중 하나인 씨게이트 바라쿠다 프로(BarraCuda Pro)를 살펴보자. 앞서 설명한 헬륨 충전 기술과 PMR 헤드 기술 등이 모두 적용된 HDD이다. 용량은 물론 12TB. PC용 드라이브로는 이전에 없던 최고의 용량을 제공하는 제품이다.

SSD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기록밀도의 증과와 더불어 다량의 플래터를 동시에 읽고 쓰는 방식으로 HDD의 성능 역시 지속적으로 진보해왔다. 살펴보고 있는 바라쿠다 프로는 초당 250MB의 데이터를 읽고 쓸 수 있다. 이정도 성능이라면, 초기 SSD와 맞먹는 수준이다.

▲ 그래서 오늘 우리는 12TB의 엄청난 HDD를 보게 됐다
▲ 그래서 오늘 우리는 12TB의 엄청난 HDD를 보게 됐다

SSD 역시 빠르게 가격 대비 용량을 늘리고 있다. 현재는 테라 바이트급 SSD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는 것이 사실. HDD가 나름의 비교우위를 유지하려면, 이런 SSD에 비해 여전히 더 많은 저장공간을 제공해야 한다.

SMR은 HDD가 적어도 용량에 있어 SSD에 대한 우위를 유지해줄 또 하나의 기술이다. 제조사들이 공개하고 있는 자료를 토대로 추산해 볼 때, 현재 사용할 수 있는 SMR 기술을 접목하면 이론상 20TB급의 HDD도 제작이 가능한 셈이다.

다만, 중첩된 위치에 데이터를 쓸 때 해당 위치의 자기 재배열이 필요하고, 이로 인해 쓰기 성능이 하락하는 것은 SMR 방식에 지적되는 문제점이다. 공기를 채우는데서 오는 문제점을 헬륨으로 해결했듯, 이런 문제에 대한 지속적인 개선이 뒤따른다면 HDD는 향후에도 용량의 우위를 지켜갈 수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

특히, 개인이 생산하는 각종 콘텐츠가 기업의 서버에 저장되는 - 트위터, 페이스북, 블로그 등이 모두 이런 방식이다 - 현재 데이터의 활용방식에서 더 거대한 스토리지를 요구받는 기업에게는 이런 HDD가 전체 스토리지의 구축과 운영비용을 크게 낮출 수 있다는 점에서 지속적으로 환영받을 것으로 예상된다. ⓒ 2017. ManzLab Corp.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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