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말부터 흉흉한 소식이 들려왔다. 대한민국 e스포츠 방송의 한 축이었고 대한민국 최초 게임 전문 채널 온게임넷이 폐국된다는 소식이었다. 

해를 넘겨 현재 온게임넷은 방송 중인 몇몇 프로그램 이외 방송 시간에는 재방송으로 편성 중이다. 즉, 방송 중인 프로그램 제작을 위한 인원을 제외하고는 최소 인력으로 온게임넷은 연명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상 폐국 수순에 들어간 것이나 다름없다.

▲ 온게임넷 스타리그 로고
▲ 온게임넷 스타리그 로고

온게임넷, 특히 99년대 말부터 2010년대 초까지 우리의 추억을 담당해주었던 채널이었다. 온게임넷이 다룬 수많은 게임 중에서 스타크래프트: 브루드 워를 소재로 스포츠조선과 함께 주최했던 '온게임넷 스타리그'(이하 스타리그)는 두말할 것 없이 온게임넷의 대표 '브랜드'였다. 스타리그를 보면 당대 누가 스타크래프트 최강자인지 알 수 있었고, 당대 어떤 종족과 전략이 유행인지 확인할 수 있었다. 

▲ 스타리그 결승전 시작을 알렸던 MC용준의 외침 (사진: 온게임넷)
▲ 스타리그 결승전 시작을 알렸던 MC용준의 외침 (사진: 온게임넷)

스타리그의 백미는 뭐니 뭐니 해도 결승전이었다. 결승전 시작을 알리는 MC용준의 '시자~~~~~~악 하겠습니다"라는 외침으로 시작해, 결승전을 보러 온 수많은 관중들이 함성이 이어지고 최후의 우승자가 은색 스타리그 우승 트로피에 키스하는 서사에는 온통 스타리그만의 정체성과 색깔로 가득했다. 

스타크래프트를 넘어 게임 자체를 좋아했다면 누구든지 '본방사수'하게 했던, 우리들의 2000년대를 수놓았던, 스타리그 역사에 남을 결승전에는 어떤 대결이 있었는지 다시 감상하며 추억해보자.

 

 

 

결승전에서 펼쳐진 '임진록'
2001 코카콜라배 온게임넷 스타리그

스타크래프트가 e스포츠로서의 입지를 굳히고 전국민적 인기를 얻을 수 있었던 이유에는 다른 스포츠들도 공통적으로 해당되는 요건, '스타의 존재'가 있었다. 

대한민국 스타크래프트 인기를 책임졌고 세기의 라이벌로 영역을 넘나들며 '현재 진행형' 관계를 잇고 있는 존재가 임요환과 홍진호, '임진록'이다. 예전 MBC게임 김철민 캐스터가 처음 이름 붙여 탄생해 스타크래프트 최고의 문화 코드가 된 '임진록'은 '2001 코카콜라배 온게임넷 스타리그' 결승전에서 펼쳐진 바 있다. 

▲ (사진: 온게임넷)
▲ (사진: 온게임넷)

스타리그 역사 상 유일한 '임진록' 결승이었다. 만약 지금 다시 보기를 한다면 스타리그 말기와는 많이 다른 어리숙한(?) 대회 분위기를 보여 e스포츠 초창기 모습을 엿볼 수 있기도 하다. 

5전 3선 승제로 펼쳐진 '2001 코카콜라배 온게임넷 스타리그' 임진록 1차전은 결승전에 걸맞으면서도 '테란-저그전' 희대의 명승부로 회자되곤 한다. 임요환 특유의 드랍쉽 플레이를 홍진호는 또 자신만의 세밀한 히드라 컨트롤로 맞불을 놓아 관중들의 마음을 훔쳤다. 뭐 당연히 결승전 결과는 모두가 알다시피 홍진호가 준우승했지만.

2021년 현재는 포커 플레이어로 주로 활동하고 있는 임요환과 홍진호의 앳된 모습을 확인하고 싶다면 '2001 코카콜라배 온게임넷 스타리그' 결승전을 보면 된다.

 

 

'가을의 전설'을 이룬 '영웅토스' 박정석
2002 SKY배 온게임넷 스타리그

'임진록'이라는 스타크래프트 고유의 문화 코드를 잇는 또 하나의 문화 코드가 등장했다. 바로 '가을의 전설'이다. 

영화 '가을의 전설'에서 기원한 스타리그 '가을의 전설'은 스타크래프트 프로토스 종족만을 위한 용어다. 드러나는 승률 상으로는 아닌데 유난히 테란·저그에 비해 약세로 느껴지는 프토로스 이미지였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프로토스 출전 선수가 유독 9월에서 11월, 가을을 거치는 스타리그에서 드라마틱하게 우승하는 경우가 많아 '가을의 전설'을 이루었다는 형용을 얻었다. 이후 프로토스 게이머가 스타리그에서 선전하면 '그는 가을의 전설을 이룰 수 있을 것인가'라는 문구로 항상 꾸며지곤 했다.

▲ 왼쪽 박정석, 오른쪽 임요환 (사진: 온게임넷)
▲ 왼쪽 박정석, 오른쪽 임요환 (사진: 온게임넷)

첫 번째 '가을의 전설'은 박정석이었다. '2002 SKY배 온게임넷 스타리그'에 진출한 단 둘 뿐인 프로토스 중 한 명이었던 박정석은 결승까지 올라 부활을 노리던 '황제' 임요환을 꺾고 만다. 그리하여 결국 '영웅토스', '가을의 전설'이라는 호칭까지 동시에 얻어냈다. 

결승전 자체도 상당한 흥행이었다. 서울 올림픽공원 평화의 광장에서 야외로 치러졌는데 약 2만 5천 명으로 최고 관객 수를 동원하기도 했다. 

'가을의 전설'을 이루고 '황제'를 꺾어 '영웅'으로 거듭난 미남 프로게이머 박정석의 우승은 스타리그 역사에 짙게 남았다.

 

 

So1 스타리그 2005
'정점'에 선 스타리그

다음 '가을의 전설'은 3년 뒤 나타났다. 'So1 스타리그 2005'에서 오영종 역시 '황제' 임요환을 꺾고 박정석을 이은 '가을의 전설'의 주인공이 됐다. 하지만 당시 오영종의 우승은 '가을의 전설'보다 더 각광받은 또 하나의 스타크래프트 문화 코드가 있었다. 첫 스타리그 출전 대회에서 우승한 선수에게만 불려지는 '로열로더'라는 칭호. 

▲ 왼쪽 임요환, 오른쪽 오영종 (사진: 온게임넷)
▲ 왼쪽 임요환, 오른쪽 오영종 (사진: 온게임넷)

오영종은 여러 흥행공식을 전부 이뤄냈다. 스타리그에 첫 진출한 선수가 '황제' 임요환을 꺾고 가을에 프로토스로 우승을 이루다니. 흥행이 되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각종 스타크래프트 관련 커뮤니티에선 누구나 인정한다. 'So1 스타리그 2005'가 역사 '정점'에 선 스타리그임을. 

개인 경기력의 마지막 불꽃을 태운 임요환, 우승으로 자신의 기량을 입증한 오영종, 신예로써 차기 스타크래프트판을 뒤흔들 것을 예고한 송병구까지. 세대교체마저 적절히 이루어진 스타리그임이 확실하다.

 

 

Daum 스타리그 2007
초유의 '역스윕' 우승

'So1 스타리그 2005'로 시작해 이후 2006년 3개 스타리그 모두 담당한 신한은행의 후원에 이어 2007년 첫 대회인 'Daum 스타리그 2007'까지가 이견 없는 스타리그의 전성기다. 특히나 'Daum 스타리그 2007'는 결승전 외적 연출이 아닌 내적 경기 내용에서 왜 스타리그가 당시 국내 최고 스타크래프트 대회인지 알 수 있었다.

▲ 왼쪽 변형태, 오른쪽 김준영 (사진: 온게임넷)
▲ 왼쪽 변형태, 오른쪽 김준영 (사진: 온게임넷)

결승에 오른 김준영과 변형태는 그야말로 5경기 모두를 혈전으로 싸웠다. 1·2경기를 먼저 변형태가 가져가 새로운 테란 최강자의 등장을 알리는 듯했다. 하지만 최종 우승은 김준영이었다. 변형태가 1·2경기를 가져갔는데?

그렇다. 김준영은 초유의 '패패승승승', '역스윕' 우승을 일구어 당대 스타크래프트판은 변형태가 아닌 김준영 자신이 지배했음을 선포했다. 특히나 5경기는 변형태 특유의 바이오닉 장기전, 그리고 이를 압도하는 김준영 전매특허 울트라리스크 '소떼'로 맵을 뒤덮어 중계진이나 관중석에서나 함성을 자아냈다.

역시 최고의 스타리그 결승전 중 하나로 꼽히는데 손색이 없었다. 초유의 '역스윕' 우승, 변형태와 김준영이라는 새로운 강자의 출현 등이 'Daum 스타리그 2007' 결승전을 화려하게 장식했다.

 

 

'대한항공 스타리그 2010 시즌 1
비행기 격납고 결승전, 그리고 또 한 번의 '역스윕'

스타리그가 전성기를 지난 것은 맞지만 인기는 여전했다. 세대교체 끝에 스타크래프트판을 지배하게 된 김택용·송병구·이제동·이영호 '택뱅리쌍'의 등장, '택뱅리쌍'을 바로 턱 밑에서 추격했던 정명훈의 등장, 김택용과 송병구를 비롯해 김구현·윤용태·허영무·도재욱이 프로토스의 전성기를 열며 결성된 '6룡', 김정우·김명운·김윤환이 프로토스의 시대를 끝내고 저그의 전성기를 새로이 열며 결성된 '3김저그'까지 여러 실력파 선수들과 흐름들이 등장하며 스타크래프트판은 계속해서 뜨거웠다.

이러한 스타리그의 잠재력을 눈여겨본 대한항공이 본격 후원으로 참여해, 스타리그 위상이 눈에 띄게 거대해졌다. 스타크래프트 양대 개인리그였던 MBC게임도 하나대투증권을 같은 시기 후원 기업으로 끌어왔지만 대한항공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 왼쪽 이영호, 오른쪽 김정우 (사진: 온게임넷)
▲ 왼쪽 이영호, 오른쪽 김정우 (사진: 온게임넷)

특히나 '대한항공 스타리그 2010 시즌 1'의 결승전의 규모가 어마어마했다. 그동안 스타리그 결승전 장소는 주로 대학교 대강당이나 체육관에서 열렸었다. 그러나 '대한항공 스타리그 2010 시즌 1' 결승전은 비행기를 보관하는 대한항공 김포공항 본사 격납고에서 펼쳐졌다. 사용 면적은 축구장 2개 크기에 달했다.

결승전을 치르기 위해 진출자 김정우는 크레인을 타고 등장했고, 이영호는 비행기에서 직접 내려 경기 부스로 향했다. 이 연출만으로 스타리그는 새 역사를 썼다.

경기 내용도 드라마틱했다. 당대 최강자 '최종병기' 이영호가 먼저 2승을 따내 당연히 우승을 차지하는듯했다. 하지만 김정우는 특유의 뒤를 보지 않는 공격적인 전략으로 내리 3승을 따내 김준영 이후 다시 한 번 '패패승승승', '역스윕' 우승을 일궈냈다. 특히나 마지막 경기에서는 저글링 생산만을 위해 가스도 일정 순간 뒤로는 캐지 않아 승부사다운 면모를 보였다. 

대한항공이라는 초대형 후원사를 등에 업어 어마어마한 스케일의 외적 연출에 더해 마지막까지 긴장감을 더한 다전제 승부까지. 스타리그 역사에 남지 않을 수 없었던 결승전이었다.

 

 

대한항공 스타리그 2010 시즌2
첫 해외 결승전에서 펼쳐진 '리쌍록'

'임진록'이 스타크래프트 초창기를 떠받친 라이벌이었다면, 이영호와 이제동의 대결 '리쌍록'은 스타크래프트 황혼기를 책임진 라이벌이다. 

종족 불문 선수 불문 이영호가 등장하면 누구든 이길 것 같은 강한 신뢰감을 준다. 모든 선수 통틀어 현재까지도 승률 71.4%로 1위이며, 2010년 6월 당시 스타크래프트 개인리그 3회 우승이 이를 증명해줬다.

이제동은 저그 유저임에도 저그에 강하게 설정된 상성 종족, 테란을 상대로 63.9%의 승률 1위를 기록했다. 역시 2010년 6월 당시에 스타크래프트 개인리그 5회 우승으로 이영호에 버금가는 위상을 보이고 있었다.

이러한 이영호와 이제동이 맞붙는 '리쌍록'이 펼쳐지면 스타크래프트, e스포츠, 문화계까지 전부 주목했다.

▲ '대한항공 스타리그 2010 시즌 2' 결승전 경기 전 모습, 왼쪽에서 두 번째 이제동, 가운데 이영호 (사진: 온게임넷)
▲ '대한항공 스타리그 2010 시즌 2' 결승전 경기 전 모습, 왼쪽에서 두 번째 이제동, 가운데 이영호 (사진: 온게임넷)

'리쌍록'이 펼쳐진 스타리그 결승은 '대한항공 스타리그 2010 시즌 2'가 유일하다. 전 시즌에 이어 후원을 맡은 대한항공은 이를 예견했었던 걸까? 8강 첫 째 날 온게임넷은 대한항공의 후원에 힘입어 결승은 중국 상하이에서 치러짐을 발표했다. 전 시즌 '격납고 결승'에 이은 충격적인 발표였다.

스타리그 최초 해외 중국 상하이에서 치러진 결승에선, 이제동은 2·3경기 연속 '4드론'이라는 극단적 전략을 선택한 결과 준우승에 그쳤다. 결국 이영호가 스타리그 3회 우승 고지에 올라 '골든마우스'를 손에 쥐었다. 

상하이에서 펼쳐진 첫 해외 결승전이었다 점, 스타리그 최초의 '리쌍록' 결승전이었다는 점 등이 기대를 한껏 하게 했지만 경기 내용은 그 기대에 미치지는 못 했다. 그래도 그 기대들과 이영호의 3회 우승에 따른 '골든마우스' 획득은 '대한항공 스타리그 2010 시즌 2'를 스타리그 역사에 남게 만들었다.

 

 

티빙 스타리그 2012 
'마지막' 스타리그 결승전

스타크래프트 2 출시, 승부조작 사건 등으로 더 이상 대한민국에서 스타리그가 숨 쉴 공간은 없어 보였다. '진에어 스타리그 2011' 이후 8개월의 공백 후에야 스타리그는 재개됐고, '티빙 스타리그 2012'는 마지막 스타리그가 됐다. 

스타크래프트 팬들은 이런 말을 종종 남기곤 한다. '하늘은 MSL(MBC게임 채널 자체 스타리그)을 버리고 스타리그를 선택했다'는 말. 마지막 스타리그였던 ''티빙 스타리그 2012'에서까지 유효한 듯했다.

'진에어 스타리그 2011' 결승전에서 혈전을 펼쳤던 허영무와 정명훈이 그대로 '티빙 스타리그 2012' 결승전에 진출한 것이다. 마지막 스타리그에서 복수혈전이라니. 흥행이 안 되려야 안 될 수가 없었다.

▲ 왼쪽 허영무, 오른쪽 정명훈 (사진: 온게임넷)
▲ 왼쪽 허영무, 오른쪽 정명훈 (사진: 온게임넷)

하늘은 정명훈의 복수 성공을 허락지 않았다. 허영무는 스타게이트 기반 캐리어 활용, 로보틱스 퍼실리티 기반 셔틀 이용 리버로 결정타, 시타델 오브 아둔 기반 다크템플러 마무리까지. 프로토스 테크트리의 전부 3가지 모두를 활용하여 정명훈을 꺾었다. 

마치 스타리그 역사의 진 주인공은 프로토스라 말하는 듯했다. 스타리그 흥행 중심에 '가을의 전설'을 박정석이 처음 썼고, 스타리그 전성기에서 다시 한 번 오영종이 프로토스 우승 계보를 이었고, 마지막 스타리그 결승전에서까지 허영무는 프로토스 모든 테크트리를 선보이며 2개 대회 연속 우승했으니 말이다.

그렇게 스타크래프트: 브루드 워 온게임넷 스타리그는 끝났다.

 

 

응답하라 2000년대

1999년 10월 2일 스타리그의 전신 '99 프로게이머 코리아 오픈'이 처음 개최됐다. 그 후로 13년 뒤 2012년 8월 4일 허영무가 마지막 스타리그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렸다. 1998년부터 2012년까지 13년동안 스타리그는 우리의 2000년대를 장식했다. 

종료된 문화가 아니다. 얼마 전까지 아프리카 TV에서 주최하는 아프리카 스타리그(ASL)가 10번째 시즌을 마무리했다. 우리의 2000년대를 수놓았던 스타리그 결승전 함성이 대회만 달리하여 계속 된 것이다. 비록 온게임넷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테지만 우리가 기억하는 스타리그 결승전 함성은 여전하다. 다시 한 번 추억을 꺼내며 외쳐보자.

응답하라 2000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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