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응용 전 대한민국 국가대표 야구 대표팀 감독이 말했다. "모든 팀에 다 이겨도 일본에 지면 전패고, 다른 나라에 다 져도 일본에 이기면 전승이다"라고.

80번째 축구 한일전이 다가온다. 오는 25일 저녁 7시 20분 요코하마 닛산 스타디움에서 우리나라 축구 국가대표팀과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이 친선 경기를 치른다.

한일전이다. 질 수 없다는 생각이 먼저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우리나라 국민이라면 모두가 동일하게 생각할 것이다. 

축구만 해당될까? 아니다. 한일전을 둘러싼 궁극의 국민감정은 종목을 불문하여 피어났고 그에 걸맞은은 드라마와 명승부가 펼쳐지곤 했다.

말 그대로 우리나라와 일본의 수준이 비슷한 종목도 있었다. 우리나라가 압도적인 종목도 있었다. 일본이 앞선 역사를 가지고 우리나라보다 높은 기량을 자랑한 종목도 있었다. 그러나 이 모든 객관적 지표를 드라마와 명승부로 장식한 과거들이 있었다. 그 역사의 순간들을 다시 만끽해보자.

 

 

피겨 스케이팅 : 김연아와 아사다 마오, 세기의 라이벌리

상반된 성장과정을 거친 두 피겨 요정이 한 시대에 만났다니, 이 얼마나 가혹하고 기구한 운명이란 말인가. 마치 결국 제갈량을 넘어서지 못 한 채 단념해야 했던 주유, 이 둘의 관계를 보는 듯했다. 2006년부터 등장한 김연아와 아사다 마오는.

대한민국은 그야말로 피겨 스케이팅 불모지였다. 거의 없다시피 한 연맹의 지원, 사람들이 많이 다녀간 후 비 개장 시간이 돼야 쓸 수 있었던 롯데월드 아이스링크에서의 훈련, 비싼 훈련비용의 완전 자가부담 등을 김연아는 모두 감내해야 했다. 그럼에도 김연아는 세계 피겨스케이팅 역사에 길이 남을 여왕이 됐다. 반면, 아사다 마오는 '만들어진' 피겨 스타와 같았다. 어릴 때부터 자국의 풍족한 지원 아래 피겨 스케이팅 엘리트 코스를 밟아 김연아와 시대를 양분하는 듯했다.

▲ (사진: IOC)
▲ (사진: IOC)

'2009 사대륙선수권'부터 아사다 마오에게 김연아는 넘을 수 없는 산이 돼버렸다. 계속해서 동반 출전하는 대회에서는 '2010 세계선수권' 1번을 제외하곤 모조리 김연아가 승리했다. 전적 면에서는 사실 라이벌이라 칭하기엔 김연아가 압도적인 면을 많이 보여왔다. 하지만 동갑내기, 한일전, 자국의 스포츠 스타라는 두 선수의 공통점에서 우리나라와 일본 뿐만이 아닌 세계 각지에서 김연아와 아사다 마오의 라이벌리를 주목하곤 했다.

분명한 사실은, 김연아 옆에 아사다 마오가 존재하여 피겨 스케이팅에서도 한일전 특유의 드라마가 적용될 수 있었다. 그로 인해 큰 관심을 보이지 않던 우리나라 국민들도 이제는 피겨 스케이팅을 주목했고 '포스트 김연아'를 찾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즉, 김연아와 아사다 마오의 라이벌리는 피겨 스케이팅 발전을 이끌었다.

 

스피드 스케이팅 : 가장 아름다웠던 한일전

우리가 생각하는 보편적 한일전의 분위기는 어떠한가? '죽어도 이겨라', '질 거면 돌아오지 마라', '져도 일본한테 지냐?', '일본을 이기는 것은 당연하다' 등의 내심 살벌한 공기가 한반도 전역을 점령한다. 하지만 믿기는가. 승부 후 서로 위로를 주고받았던 한일전이 있었다는 게. '2018 평창 동계올림픽' 스피드 스케이팅 500m 경기에서 그 감동은 피어났다.

과정을 보면 김연아와 아사다 마오의 반대다. 원래는 이상화가 먼저 세계 여자 스피드 스케이팅계를 정복했다. '2010 밴쿠버 동계올림픽'과 '2014 소치 동계올림픽' 500m 종목에서 이상화는 연달아 금메달을 차지해 '빙속여제'로 군림했다. 반면, 고다이라 나오는 같은 올림픽 같은 종목에서 5위를 차지해 당시에는 이상화보다 한 수 아래의 성적을 냈다. 

▲ (사진: IOC)
▲ (사진: IOC)

그리고 4년 후, 고다이라 나오는 '성난 고양이 자세'로 주행 자세를 변경해 '2018 평창 동계올림픽' 500m 경기에서 36.94 기록해 올림픽 신기록을 세워 사실상 금메달을 확정 지었다. 그 순간, 고다이라 나오는 원정 응원을 온 일본 팬들에게 '쉿!'하며 정숙을 요구했다. 이유는 곧 이상화의 순서였기 때문. 결과적으로 이상화는 고다이라 나오에 이은 2위를 기록했다. 주행 후 이상화는 눈물을 터트렸고 기다린 고다이라 나오는 이상화를 안아주며 위로했다. 이 잠깐의 우정은 세계 모두를 감격시켰고, 올림픽 공식 인스타그램은 둘의 위로 사진을 게재하며 '오늘의 사진'으로 소개하기도 했다.

물론 지난 날 일본의 역사적 과오와 연결하면, 일본이란 나라의 인상이 우리나라 국민들 입장에서 좋을 리가 없다. 하지만 그 인상을 현재를 살아가는 일본인 전체로 덮어 씌우진 말자. 고다이라 나오처럼 진심으로 한국인을 위로하며 마음으로 대하는 일본인도 분명 있으니. 한일전도 아름다울 수 있음을 우리는 확인했지 않은가.

 

컬링 : 단 한 번의 샷 하나

김연아와 아사다 마오처럼, 이상화와 고다이라 나오처럼 시대를 장식한 한일전이 있었는가하면, 그동안의 드라마는 전무하다가 단 한 번의 경기로 단 한 순간의 장면으로 세기의 한일전으로 남은 승부도 있었다. 이 역시 '2018 평창 동계올림픽'에서 벌어졌다.

컬링 역시 김연아와 마찬가지였다. '2018 평창 동계올림픽' 전까지 컬링은 국민들의 관심 밖이었으며, 세계 강호들을 연달아 꺾었다는 소식에 그제서야 국민들은 '컬벤져스'의 행보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 관심의 정점은 4강 한일전에서 폭발했다.

▲ (영상: 유튜브 MBC 스포츠탐험대 공식 계정)

앞선 예선에서 유일하게 '컬벤져스'는 일본에게 패했다. 그러고 나서 4강에서 일본을 다시 만난 것이다. 승부는 치열했다. 갖가지 수가 난무하여 결국 7:7 동점으로 연장전 11엔드까지 돌입했다. 스킵 김은정의 마지막 샷 전, 일본팀의 스킵 후지사와 사츠키 던진 스톤 하나가 대한민국 스톤들보다 중앙 버튼에 가깝게 파고들었다. 그야말로 1점 승부. 김은정은 심호흡 후, 일본팀의 노란 스톤보다 더 버튼에 가깝게 스톤을 던지는 데 성공해 짜릿한 1점 차이 연장전 승부를 승리로 장식했다.

국민 모두가 소리를 지를 수 밖에 없었던 경기였다. 올림픽에서 일본을 만나 연장전까지 가서 스톤 1개로 승리하다니. 이후 '컬벤져스'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컬링 스타가 됐다. 이 날의 한일전 명승부 덕분인지, '평창 올림픽으로 새롭게 관심을 갖게 된 종목은 무엇인가?'라는 설문조사에서 55%의 응답을 받아 명실상부 국민 동계 스포츠로 발돋움했다.

 

야구 : 비록 아시아 종주국이 일본일지라도

야구의 기원은 여러 설들이 있다. 미국과 영국이 각기 강력히 야구의 종주국이라 주장한다. 아시아에선 일본이 1936년 프로야구 NPB를 최초로 설립해 '아시아 야구 종주국’이라는 형용을 자주 사용한다. 종주국 여부를 인정하는 것을 떠나서 일본이 우리나라 프로야구 KBO가 설립된 해 1981년보다 45년이나 빠르니 그에 따른 각국 야구 인프라 차이, 산업 규모 차이는 존재할 수 밖에 없다.

그런데 왜 우리나라 야구는 그렇게 강력하고 자국 자부심으로 똘똘 뭉친 일본 야구에 그리 밀린다는 느낌이 안 들까? 곳곳의 중요점에서 우리나라는 과학적으로, 통계적으로 풀 수 없는 투지와 긍지로 일본을 이겨왔기 때문이다. 

1982년 야구 월드컵에서는 김재박의 개구리 번트에 이은 한대화의 3점 홈런으로 야구 한일전의 서막을 시작했다. '2000 시드니 올림픽’에서는 이승엽이 '약속의 8회'에 2타점을 기록하여 동메달을 거머쥐었다. 본격적인 세계 야구 대회의 시작을 알린 '2006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서도 2경기나 '약속의 8회'를 지켜 3전 2승 1패의 전적을 가져갔다. '약속의 8회'는 ‘2008 베이징 올림픽’에서도 이어졌다. 준결승에서 만난 일본을 다시 8회에 이승엽이 결승 홈런을 쏘아 올려 일본을 제압하고 쿠바까지 꺾어 금메달까지 얻어내는 쾌거를 이뤘다. 

마지막 야구 한일전 승리는 '2015 WBSC 프리미어 12' 4강전이었다. 참고로 'WBSC 프리미어 12'는 일본 중심 진행 대회였다. 일본을 상대하는 팀들은 경기 전 훈련도 제대로 하지 못 했다. 경기 간 이동 거리도 일본팀 중심이었다. 타국 해설진 부스는 자국 응원팀 구역에 임시로 설치했다. 이런 환경 속에서도 대한민국 야구 대표팀은 '2015 WBSC 프리미어 12' 4강전에서 ‘약속의 8회’보다 1회 늦은 '기적의 9회'에서 3점 차를 4점으로 뒤집으며 승리했다. 결국 'WBSC 프리미어 12'의 초대 우승국은 대한민국이 차지했으며, 일본은 죽 쒀서 대한민국 준 꼴이 됐다. 

우리는 잊지 못 한다. 정우영 캐스터의 "바로 이 날은 대한민국 야구 역사에 앞으로 영원히 남습니다"의 선언을, 경기 후 SBS가 배경음악으로 선택하여 들려준 마야의 '진달래꽃'을, 일본 야구 대표팀의 멘탈을 박살낸 오열사의 얄미운 루틴과 호쾌한 빠던을.

 

축구 : 한일전은 누가 뭐래도

다른 여러 종목에서 한일전이 여럿 생겨났고 그에 따른 드라마는 우리나라 국민들을 충분히 열광시키고 자극시켰다. 하지만 누가 뭐래도 한일전의 백미 종목은 축구임에는 변함이 없다. 그리고 유난히 축구 한일전은 고유의 드라마를 써 내렸을 만큼 다양한 광경을 연출해왔다.

1994년 히로시마 아시안 게임 8강전부터 축구 한일전의 서사는 서서히 쓰여다. 황선홍의 2골에 힘입어 역전에 재역전을 거듭한 끝에 대한민국 축구 대표팀은 3:2로 일본을 꺾고 4강에 진출했다. 그리고 4년 뒤, '도쿄대첩'이 벌어졌다. 경기 종료 7분 전까지 0:1로 리드를 당하던 대한민국 축구 대표팀은 서정원의 동점골 그리고 항상 애국가에 등장하던 이민성의 중거리 역전골로 1998 프랑스 월드컵 본선 진출을 쉽게 이끌 수 있었다. 이민성의 역전골 직후 터진 당시 MBC 송재익 캐스터의 "후지산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멘트는 아직도 희대의 명언으로 회자된다. 

그리고 2000년대 들어, 우리의 '해버지' 박지성은 일본 수비수 4명을 뚫고 중거리슛을 성공시키는 위엄을 직접 보이고, 소위 '산책 세리모니'로 사이타마 스타디움 내 울트라 닛폰을 강제 침묵시켰다. 이어 박주영이 PK까지 성공시켜 2:0 승리로 장식했다. 2년 뒤, '2012 런던 올림픽' 동메달 결정전에서도 박주영은 박지성처럼 4명의 일본 수비수 사이로 슛을 성공시켜 일명 '박시탈 골'로 대한민국에 동메달을 안겨주었다. 

▲ (사진: 대한축구협회)
▲ (사진: 대한축구협회)

마지막으로 우리의 기억 속에 강렬하게 남은 한일전 승리는 '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 게임' 축구 결승전이었다. 0:0으로 승부를 가리지 못 한 채 연장전에 돌입하자마자 3분 만에 이승우가 골을 작렬시켜 일본 자동차 브랜드 도요타 광고판 앞에서 세리머니를 보였다. 8분 뒤, 황희찬이 헤딩슛으로 추가점을 얻어내 8년 만에 박지성 이후로 다시 '산책 세리머니'를 선보였다. 비록 일본이 1점을 따라붙긴 했지만 결국 2:1로 승리했다. 이 날의 승리로, 군 면제 혜택을 받은 손흥민은 순도 200% 환호를 내질렀다.

다른 종목에서도 한일전에 벌어져도 대부분의 우리나라 국민들은 한일전이라면 축구부터 떠올린다. 그만큼 축구에서의 한일전 상징성이 대단하다는 뜻이다. 우리나라 축구도 세계 축구 발전에 따라 많이 발전했다. 부디 앞으로 치러질 모든 한일전을 지난 날의 영광스러운 기억처럼 압도해주기를.

 

 

영원히 끝나지 않을 드라마

끝날 수가 없는 관계다. 한국과 일본은. 지리적으로도 맞붙어있다. 가릴 수 없는 역사는 영원히 남는다. 고로 스포츠 내 한일전은 영원히 끝날 수 없다.

물론 일본에게 진다면 아쉬운 마음과 분노가 2배로 치밀어 오른다. 그러나 스포츠다. 스포츠의 정의는 동일한 규칙을 가지고 서로 실력을 겨누는 것을 말한다. 정정당당한 승부로 이겼다면 승리를 만끽하고 졌다면 안타깝더라도 경기를 치른 선수들에게 응원과 지지를 보내자. 우리를 바라보는 입장이지만 선수들은 직접 뛰면서 한일전의 서사를 써 내려가지 않는가. 선수들을 향한 아낌없는 찬사가 있어야만이 다음 한일전을 승리할 수 있는 감정적 밑바탕이 된다.

이를 선수들과 국민 모두가 알고 있기에, 손흥민과 황희찬이 없더라도 오는 25일 80번째 축구 한일전의 승리의 답을 찾아낼 것이다. 늘 그랬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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