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선우현정(임상심리전문가/정신건강임상심리사)

 

부모님과 내원한 아이의 얼굴이 창백하고 기운이 없어 보였습니다. 인사를 건네자 입술을 삐죽이며 부모님 뒤로 숨어버렸습니다. “아이가 기분이 안 좋아 보이네요.” 부모님께 묻자 당황한 듯 아이를 재촉했습니다. “얘가 또 이러네. 매번 이렇게 바보같이 굴어요. 인사해 얼른.” 아이는 고개를 더 깊게 파묻었습니다. 

내원 사유를 묻자 악몽을 심하게 꾸는 거 같다고 했습니다. 매일 밤 그런 건 아니지만 일주일에도 두세 번씩 새벽에 일어나 목 놓아 울음을 터트린다는 것이었습니다. 안아주기도 하고 달래주기도 해봤지만 한 번 울기 시작하면 정신없이 울어대서 좀처럼 가라앉지 않는다고 했고, 이유를 물어도 대답을 안 해서 답답한 심정이라고요. 그런 날이면 온 가족이 다 잠에서 깨서 고생을 한다고 합니다. 큰 울음소리 때문이기도 하지만 아이가 한자리에 머무는 것이 아니고 온 집안을 돌아다니면서 울기 때문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오늘 하루가 힘들었나 보다’ 생각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자꾸만 같은 상황이 반복되자 가족들도 지치고 예민해졌다고 했습니다. 대체 왜 그러는지 물어도 눈에 초점이 없고 반응도 없어 도무지 대화가 되지 않으니까요. 그러다 보니 부모님도 화가 나서 울고 있는 아이에게 큰 목소리로 화를 내거나 붙잡아 흔들면서 정신을 차리게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가끔 눈을 마주치고 “어?”하고 대답을 하기도 한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다음 날이면 아이는 새벽에 있었던 일을 전혀 기억하지 못한답니다. 본인이 새벽에 깨서 울었던 것을 어렴풋이 기억하는 날이 있기도 하지만 대부분 일어났던 사건 자체를 기억하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부모님들은 더 답답한 마음이었을 겁니다. 

 

수면 각성 장애 ‘야경증’

이 같은 사건수면(수면중 또는 수면과 관련하여 나타나는 이상행동 또는 생리현상)은 어린아이들에게서 제법 흔히 관찰됩니다. 이런 사건수면을 ‘야경증’이라고 하고, 흔히 몽유병이라고 부르는 ‘수면 보행증’과 함께 ‘비렘수면(NREM, Non-Rapid Eye Movement sleep) 각성장애’에 속합니다. 

야경증은 보통 수면의 초기 1/3 동안(취침한 지 2~3시간 후)에 발생하고 잠에서 불완전하게 깨는 양상을 보이는데 소리를 지르면서 갑작스럽게 깨거나 극심한 공포, 동공 산대, 빈맥, 빈 호흡, 발한과 같은 자율신경계 반응이 두드러지게 관찰됩니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의 안심시키려는 시도에 거의 반응을 하지 않고 꿈의 내용이나 잠에서 깼던 삽화 자체를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 특징적입니다. 대부분의 경우 1분에서 10분 정도 증상이 지속되지만 아이들마다 보이는 양상은 다양할 수 있습니다. 

부모님들은 아이가 악몽을 꾼다고 여길 수 있는데 사실 반복적인 악몽을 꾸는 ‘악몽 장애’와는 몇 가지 차이점이 있습니다. 악몽 장애는 잠에서 완전히 깨어나며, 불쾌한 꿈의 내용에 대해 직접 보고할 수 있습니다. 또 주변 사람들이 안심시켜주면 진정되는 등 반응적인 양상을 보입니다. 즉, 악몽은 수면에서 완전히 벗어난 상태지만 야경증은 불완전하게 벗어난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악몽은 렘수면 동안 발생하기 때문에 수면의 초반부가 아닌 후반부에 발생하는 차이점도 있습니다).

때문에 야경증을 보이는 아이에게 “왜 그러는 거야.”, “말을 해야 알지.”와 같이 재촉하고 이유를 묻는 것은 큰 의미가 없기도 하고 좋은 대처 방법은 아닙니다. 오히려 아이의 불안감을 증폭시키고 우는 행동이 더 길어지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보다는 아이가 안정을 찾을 때까지 곁에 머무르며 관찰하는 것이 좋습니다. 가능하다면 크게 돌아다니지 않도록 안은 상태에서 진정시키는 것이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달래는 것이 소용없다고 판단해 혼자 울면서 돌아다니게 두면 아이가 완전히 각성된 상태가 아니기 때문에 신체적인 부상을 입게 될 수도 있습니다. 

 

야경증은 가족력이 원인?

야경증은 많은 경우 가족력이 있습니다. 반드시 유전되는 것은 아니지만 아이가 뇌의 각성 조절에 취약한 면을 타고난 경우가 흔합니다. 하지만 대체로 청소년, 성인기가 되면서 증상이 자연스럽게 감소되거나 사라지는 편이기 때문에 너무 걱정하지 말고 경과를 지켜보는 것이 좋습니다. 다만 증상이 극심해서 가족의 일상생활이 침해되거나 아이의 건강이 우려된다면 소아정신과를 방문해서 전문의와 의논해 보시길 바랍니다. 

야경증은 유전적, 생리적 원인이 많은 부분을 차지하지만 환경적 요인에 의해서도 충분히 영향을 받을 수 있습니다. 야경증을 보이는 아이들은 긴장감과 스트레스가 높은 날이면 더 극심한 증상을 보일 수 있습니다. 때문에 낮 동안에 부정적인 정서가 과도하게 누적되지 않도록 안정적인 환경을 마련해 주는 것이 좋고, 적당한 신체적 활동을 포함한 외부 일정을 통해 스트레스를 해소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부모 양육 행동도 돌아보세요

부모님의 양육 행동도 한 번쯤 돌아보는 것이 좋습니다. 긴장감이 높고 위축돼 있는 아이들이 수면 장애를 보이는 경우가 흔한데, 평소 부모님은 위축돼 있는 아이의 태도를 못마땅해 하고 재촉하거나 부정적인 평가를 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아이가 듣고 있는 상황에서 “얘는 자신감이 없어.”, “그것도 못하니?”, “또 그러네.”와 같이 사기를 저하시키고 긴장감을 높이는 언행을 하고 있지 않은지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야경증은 아이의 의지와 관련 없이 나타나는 증상이고, 때문에 증상을 스스로 조절할 수 없습니다. 떼쓰거나 불만을 표시하는 것이 아니니 ‘못하게 만들겠다’, ‘버릇을 고쳐주겠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는 아이가 다치지 않도록 곁에 머무르며 증상이 개선될 때까지 인내해 주시길 바랍니다. 

 

글 = 선우현정(임상심리전문가/정신건강임상심리사)

정신건강의학과에서 일하고 있는 임상심리사입니다. 특히 아동/청소년의 정신건강에 주력하고 있고 이와 관련한 소통을 환영합니다.

관련기사

저작권자 © 맨즈랩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