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티칸을 지키는 유럽의 대표 용병 스위스 용병
- 세계적으로 큰 환상을 지니고 있는 프랑스 외인부대
- 용병 중 가장 강한 개인 전투력이라는 구르카 용병

북한의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12일 싱포그 센토사 섬 카펠라 호텔에서 단독·정상회담을 개최했다.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역사적인 순간을 진지하게 바라볼 것이다. 하지만 오늘 우리가 살펴볼 내용은 이 세기의 순간을 경호하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다. 이미 많은 언론에서는 북한의 김정은 위원장과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경호를 책임지기 위해 싱가포르 경찰이 영국군에 의뢰해 고용한 구르카 용병을 주목한 바 있다.

이들의 영웅담은 우리에게도 익숙하다. 2차 세계대전 당시 구르카 용병 1명이 단검 ‘쿠크리’ 한 자루를 들고 일본군 참호로 뛰어들어 수명의 목숨을 빼앗은 일화는 매우 유명하다. 또한 퇴역한 구르카 용병 1명이 40명에 달하는 열차강도와 싸워 쫓아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번 북·미 정상회담으로 구르카 용병이 화제를 모으고 있지만, 사실 이들만이 세계 최고의 용병부대로 취급되는 것은 아니다. 그루카 용병 외에도 프랑스의 외인부대, 스위스 용병이 있다. 이들을 혹자들은 세계 3대 용병이라고 부른다.

용병이란 말 그대로 특정 국가, 집단으로부터 보수를 받고 싸우는 군대, 군인을 뜻한다. 오늘날 스포츠 분야에서 한 국가의 프로팀이 외국에서 선수를 영입했을 때도 용병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하지만 용병이라는 단어 자체의 뿌리는 전쟁터에서 등장했다. 군사용어라는 것이다.

 

천조장사전별도 속 해귀로 추정되는 그림
천조장사전별도 속 해귀로 추정되는 그림

용병이란 무엇인가? 역사 속 용병들
용병을 직업으로 분류한다면 그 역사는 매우 오래됐다. 고대 이집트군, 그리스군, 페르시아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특히 유명한 것은 페르시아에서 고용한 그리스 용병 1만여명이다. 이들은 반란을 일으킨 키루스 왕자를 따라 전쟁을 벌였다가 키루스 왕자가 죽자 적지 한 가운데서 페르시아군의 추격대를 뿌리치고 산악지대에서 토착민들의 공격까지 버텨내며 탈출한다. 이 같은 과정은 용병대 장교가 남긴 아나바시스라는 책을 통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또 유명한 일화는 로마군에서 고용한 용병들이다. 기병이 약했던 로마군은 누미디아 기병, 갈리아 기병, 게르만 기병을 수시로 고용해 기병 전력을 강화했다. 또 투석병, 투창병, 궁수와 같이 특수한 기술이 요구되었던 병과들에 용병을 고용하기도 했다. 다만, 오늘날 로마의 몰락 원인 중 하나로 용병들의 정치적 타락이 언급될 정도로 용병의 빛과 그림자가 극명했다.

우리나라도 임진왜란 당시 용병을 기용했다는 다양한 기록이 남아 있다. 류성룡의 징비록에는 명나라로부터 파견된 용병이 등장한다. 특히 흑인이 등장하는데, 이들은 아프리카계 흑인을 노예로 부리던 포르투갈에서 명나라를 통해 조선에 파견한 용병이었다는 설이 유력하다. 당시 흑인을 처음 접했던 사람들은 해귀(海鬼, 바다를 건너온 귀신)라 불렀다.

근대에 용병이 두각을 나타냈던 시점은 제2차 세계대전이다. 세계대전 이후 여기저기서 등장했던 신생국들이 미처 정비하지 못한 군대의 체계를 용병에 의지하곤 했다. 특히 아프리카에서 잇따라 벌어진 내전에 용병들이 대거 활용됐고,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이 같은 환경은 용병을 요구하는 시장이 커졌다는 의미로, 이는 전문적인 민간군사기업이 탄생한 계기이기도 하다.

 

바티칸의 스위스 근위대. 의상은 상징적인 것에 불과하며 평상 시에는 정장을 입고 교황을 경호한다.
바티칸의 스위스 근위대. 의상은 상징적인 것에 불과하며 평상 시에는 정장을 입고 교황을 경호한다.

오랜 역사와 전통, 스위스 용병
북·미 정상회담으로 구르카 용병이 유명해졌지만, 사실 해외에서는 용병하면 스위스 용병을 가장 먼저 떠올린다고 한다. 현재 스위스 용병은 바티칸에서 교황청 근위대로 유명하다. 하지만 스위스 용병이라는 것은 현대 사회에서 존재하지 않는다. 스위스 정부가 19세기부터 용병업을 금지했기 때문에 국가명을 딴 용병집단은 없다. 바티칸 근위대도 경찰에 가깝다.

스위스 용병이 유명한 이유는 충성심 때문이다. 특히 용병을 많이 활용했던 유럽에서 스위스는 국가적으로 용병집단을 다른 국가에 파견했다. 이들은 다른 유럽 국가의 용병과 달리 어느 나라로 파견되든 그 나라를 위해 끝까지 싸우는 것으로 유명했다. 심지어 아들과 아버지, 형제가 전쟁터에서 적으로 만났다는 일화들도 많다.

스위스 용병의 상징적인 사건은 바티칸에서 발생한다. 1503년 교황 율리오 2세가 스위스 정부에 근위병 200명을 파견해 줄 것을 요청했고, 스위스에서 파견한 근위병 150명은 1506년 1월 22일 로마에 도착한다. 이날이 바로 교황청 근위대의 창설 기념일이다.

그러나 스위스 근위대는 1527년경 위기를 맞이한다. 신성로마제국의 군대가 로마를 약탈한 전투가 발생했고, 당시 바티칸에는 모든 용병들이 도망치고 스위스 근위대만 남아 189명 중 147명이 전사한다. 이에 당시 교황이었던 클레맨스 7세가 조국으로 돌아가라 권고했지만 나머지 42명의 스위스 근위대는 끝까지 남겠다는 맹세를 지키겠다며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마지막까지 전투를 벌인다. 교황청은 이 사건 이후 바티칸에 스위스 근위대만 고용하고 있다.

현재 스위스 근위대의 선발 과정은 매우 까다롭다. 우선 스위스 군대에서 복무한 경력이 있어야 하고, 미혼의 카톨릭 신자여야 한다. 학력은 고졸 이상, 연령은 19세에서 30세 사이, 키는 174cm 이상, 신분출신이 명확하고 도덕적, 윤리적 문제가 없어야 한다. 신체적 건강 상태는 두 말 할 나위가 없다. 이들은 오직 교황에 대한 신변보호의 임무만 맡는다.

 

백인, 흑인, 아시아인 등이 섞여 있는 프랑스 외인부대.
백인, 흑인, 아시아인 등이 섞여 있는 프랑스 외인부대.

프랑스의 정규군 ‘외인부대’
외인부대라는 것은 한 군가의 정규군이지만 해당 국가의 국적을 가진 국민이 아니라 외국인들로 구성된 부대를 뜻한다. 우리나라에서도 한국전쟁 당시 국군에서 200명 정도의 화교 출신들로 구성된 SC(seoul chinese) 부대를 활용한 바 있다. 이처럼 다양한 국가에서 외인부대를 구성하고 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곳이 바로 프랑스의 외인부대다.

프랑스 외인부대는 1831년 루이 필리프 1세가 당시 식민지였던 알제리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용병 5개 대대를 구성한 것이 시초다. 이 용병 부대를 정규군으로 편입한 것이 오늘날 프랑스의 외인부대다. 특히 외국인 부랑자와 망명자 등을 용병으로 모집해 전쟁터로 치운다는 정치적인 배경이 있었지만, 오히려 범죄를 저지르거나 실직한 프랑스인들이 몰려들기도 했다.

더구나 외인부대는 적군의 입장에서 돈에 미친 침략자라는 시선 속에 포로로 붙잡힐 경우 더 혹독한 대우를 받았다. 실제 베트남전 당시 프랑스 외인부대는 10,483명이 전사했다. 외인부대가 1만명 넘게 희생된 사건은 베트남전이 유일하다. 프랑스 외인부대의 이 같은 드라마틱한 배경 탓에 소설, 드라마, 영화에 자주 등장하기도 한다. 범죄자들이 모여 훈련을 받고 전쟁터에서 살아남기 위해 무슨 짓이든 다 한다는 식이다. 이는 외인부대에 대한 환상을 심어줬다.

사실 프랑스 외인부대는 뚜렷한 일화가 많지 않다. 특수부대라는 오해가 있지만 정규군 중 한 부대일 뿐이며 외국인들이 모여든 만큼 주로 파병 업무를 맡고 있다. 다만, 전투에 투입되는 비중이 높다. 제2차 세계대전부터 베트남전, 걸프전, 아프가니스탄 전쟁 등에 투입됐다. 해외 파병 병력에서 1순위에 꼽히는 곳이 바로 외인부대라는 점은 기본적인 전투력이 높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 입대할 경우 혹독한 훈련을 받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프랑스 외인부대는 신분출신을 묻지 않고 입대할 수 있어 부랑자나 범죄자가 모인다는 생각과 달리 철저한 신원조회를 거친다. 당연히 범죄자는 입대할 수 없다. 신체검사와 체력측정을 통해 입대한 이후에는 4개월 간 기초훈련을 받는다. 해외 방송 프로그램 등에서 소개된 바에 따르면 훈련의 강도가 상당하다. 5년의 기본 복무 이후에는 프랑스 국적, 연금, 프랑스 공공요금 70% 할인 등의 혜택을 받고, 외인부대 관련 기업(와인공장, 포도농장 등)에 취업할 수 있다.

 

1815년 당시 구르카 용병을 상상해 그린 그림
1800년대 당시 구르카 용병을 그린 그림

강한 개인 전투력 자랑하는 구르카 용병
구르카 용병은 네팔의 고르카 지역 출신의 군인을 말한다. 고르카 지역에는 히말라야 산맥 등 세계에서도 가장 높고 험한 산간지대다. 이 지역 출신들은 기본적으로 심폐량이 높고 체력이 강한 것으로 알려졌다. 네팔의 전통 단검인 쿠크리를 이용하며, 과거 전쟁에서 승리한 영국군에 의해 구르카라는 명칭으로 불리게 됐고, 이 지역 출신들이 구르카족으로 불린다.

구르카 용병은 인도를 식민지로 지배했던 영국군이 네팔까지 진출해 고르카 지역을 평정한 이후 구르카족을 용병으로 활용하면서 시작된다. 영국은 각지의 식민지에 현지인들로 조직된 외인부대를 창설해 유지하다 각 식민지를 독립시켜주는 과정에서 대부분을 해체했지만 구르카 용병만큼은 현재까지 2개 대대를 유지하고 있다.

우리에게는 믿기 힘든 일화와 남·북 정상회담의 경호를 맡아 유명해졌지만 사실 구르카 용병의 명성은 제2차 세계대전 때 알려졌다. 북아프리카에서는 독일군을, 동남아시아에서는 일본군을 상대로 전투를 벌였다. 독일군과는 야밤의 기습으로 목을 베거나 귀를 베어가 공포의 대상이 됐고, 일본군과는 반자이 돌격에도 불구하고 무쌍을 펼쳐 맹위를 떨쳤다. 전설적인 이야기들이 대부분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만들어진 것이다.

특히 영국과 아르헨티나의 포클랜드 전쟁 당시에는 구르카 용병이 온다는 소식에 아르헨티나 군인들이 혼비백산 했다는 일화가 있으며, 파키스탄과 인도가 벌인 카길 전쟁에서는 인도군에 속해 파키스탄군과 백병전에서 우위를 점한 것으로 알려졌다. 구르카 용병의 일화는 주로 소수가 다수의 포위를 뚫고 탈출했다거나 다수의 적을 섬멸했다는 식의 내용이다. 이는 구르카 용병이 매우 강한 개인 전투력을 지니고 있다는 점을 설명한다.

구르카 용병의 처우는 영국군과 동일한 것으로 알려졌다. 영국군에서 비정기적으로 구르카 용병을 선발하고 있으며, 경쟁률이 수십대 일에서 수백대 일까지 넘어선다. 선발과정 중 유명한 것은 ‘도코 레이스’다. 25kg의 돌을 채운 바구니를 머리에 매고 가파른 산길 6km를 30분대에 돌파해야 한다. 하지만 영국군에만 구르카 용병이 있는 것은 아니다. 인도군에서도 선발하고 있으며, 말레이시아, 아프가니스탄 주둔 부대 등에서도 용병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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